[조선왕 호칭/이름] 종(宗)·조(祖)·군(君) 묘호 차이

[조선 왕 호칭/이름] 종(宗)·조(祖)·군(君) 묘호 차이

조종군차이
종, 조, 군 차이

조(祖)

·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업한 왕에게만 사용한다. ▶ 1대 임금이므로 후대의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다.(태조, 고조 등)

· 참고로, 고려에 조(祖)가 붙은 왕은 태조 왕건 뿐이다.

· 공이 있는 왕에게 조(祖)를 붙인다.(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왕)

· 선왕의 적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경우에 명분과 정통성을 부과하기 위해 붙인 경우가 많았다.

 

종(宗)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에게 붙인다.

· 덕이 있는 왕에게 종(宗)을 붙인다.

· 별다른 위기없이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에 붙인다.

 

※ 예기, 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에 공이 있는 사람은 '조(祖)'라고 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종(宗)'을 붙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군(君)

· 폐위된 왕은 자격을 박탈당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시절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에 따로 기록된다.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폐위

 

 

조·종·군이 붙은 임금

조(祖)가 들어간 임금

태조(太祖), 세조(世祖), 선조(宣祖), 인조(仁祖),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 7명

 

종(宗)이 들어간 임금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예종(睿宗), 성종(成宗),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경종(景宗),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 + 순종(純宗) ▶ 17명 + 1명

 

군(君)이 들어간 임금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 ▶ 2명

 

 

※ '조(祖)'가 붙은 임금

· 태조(조선 제1대 임금)

조선을 창업한 왕이므로 묘호가 '태조(太祖)'이다

 

· 세조(조선 제7대 임금)

나라를 창업한 것에 준하는 업적을 남겼다는 의미로 '조(祖)'를 사용했다. 원래 신하들은 신종(神宗)·예종(睿宗)·성종(聖宗)을 추천했으나 아들인 예종은 '세조(世祖)'를 강력히 주장했다. 신하들은 이미 '세종(世宗)'이 있었기 때문에 '세(世)'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예종은 중국 한(漢)나라 때도 세종(전한)과 세조(후한)가 모두 있었다며 묘호를 세조로 밀어붙였다.

 

· 선조(조선 제14대 임금)

원래의 묘호는 '선종(宣宗)'이었다. 허균, 이이첨 등은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새롭게 재건한 업적이 있다며 '조(祖)'를 붙일 것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 광해군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묘호를 '선조(宣祖)'로 추숭했다.

 

· 인조(조선 제16대 임금)

패륜을 저지른 광해군을 내쫓고 나라를 새롭게 만들었고 병자호란을 극복한 업적이 있다며 '조(祖)'를 사용했다. 원래의 묘호는 '열조(烈祖)'였다. 그러나 '열조'라는 묘호가 왕위를 찬탈한 당나라(남당)의 임금에게 붙여졌던 이력이 있어서 논란이 되자 일을 다시 의논하여 묘호를 '인조(仁祖)'로 변경했다.

 

· 영조(조선 제21대 임금)

원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다. 1890년, 고종은 탕평책으로 당쟁을 막아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잘 다스렸다는 공을 근거로 '영조(英祖)'로 추숭했다.

 

· 정조(조선 제22대 임금)

원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다. 대한제국 황제에 오른 고종은 1899년, 자신의 직계 혈통을 높이려는 의도로 '종(宗)'을 '조(祖)'로 바꾸어 정조(正祖)로 추숭했다.

 

· 순조(조선 제23대 임금)

원래의 묘호는 '순종(純宗)'이었다. 문무를 고루 갖추었고,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천주교를 배척했다는 공을 근거로 추숭되었다. 철종 때 실권자였던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철종을 왕으로 만든 후,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남편을 '순조(純祖)'로 추숭했다. 순조는 영조와 정조보다 후대의 임금이지만 '조(祖)'로 먼저 추숭되었다.

 

 

※조선의 왕에 조(祖)가 붙은 이유

나라를 창업한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왕에게 '조(祖)'를 쓴다. 그래서 체감상 조(祖)가 종(宗)에 비해서 격이 높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정이나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이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후손(아들)이 '종(宗)'에서 '조(祖)'로 추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종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몰아낸 공으로 묘호를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왕의 호칭(묘호)

·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다.

· 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묘호가 없었고,'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불렸다.

· 왕이 죽은 후에 붙이므로 당사자는 알 수 없다.

· 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왕과 고위 관료들이 정한다.

· 왕의 업적을 한글자로 표현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신다.

 

※묘호의 예

· 문종(文宗): 학문에 뛰어난 왕

· 성종(成宗):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왕

· 세종(世宗):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

· 인조(仁祖): 어진 왕

· 중종(中宗):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왕

·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왕

· 태종(太宗):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

· 효종(孝宗): 효성이 지극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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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갑자 역사] 연도별 한국사 주요 사건

[육십갑자 역사] 연도별 한국사 주요 사건

우리나라의 주요 역사적 사건에는 육십갑자가 붙은 이름이 많다. 그런 사건을 순서대로 연도별로 모아보았다.

 

육십갑자한국사역사
육십갑자로 보는 한국사 역사

 

무인정사(1398년, 태조 7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태조 이성계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자 정도전 등은 이를 지지하고, 전비 한씨의 소생인 방원 등이 이에 분개하면서 이복 형제간에 일어난 싸움이다. 이방원은 휘하 부하들과 사병들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살해한 후, 이복 형제인 방석과 방번까지 죽이고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기해동정(1419년, 세종 1년)

이종무 등이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한 일

대마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생활이 궁핍해지자 대마도의 왜적들은 명나라 해안으로 약탈하러 가는 도중에 조선의 해안지역을 약탈했다. 조선에서는 이를 새로운 대마도 도주의 선동이라고 간주하고,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삼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기해왜역' 또는 '대마도 정벌'이라고도 한다.

 

계해약조(1443년, 세종 25년)

왜인들의 조선 왕래를 통제하기 위해 쓰시마 섬 도주와 맺은 조약

쓰시마섬을 정벌한 후, 조선과 일본과의 왕래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이에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된 쓰시마 도주는 조선에 여러 차례 통교를 요청했다. 그러자 조선은 삼포를 개항하고 이전에 비해 제한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했다.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왕권 탈취를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인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 그리고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들을 소집하여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등의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낸 후, 나중에 사약을 내려 죽였다. '계유사화'라고도 한다.

 

병자사화(1456년, 세조 2년)

사육신 등이 단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세조를 축출하려 한 사건

단종을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의 계획이 동지였던 김질의 배반으로 탄로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세조는 이들을 직접 심문했고, 이 일과 관련된 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경진북정(1460년, 세조 6년)

신숙주 등이 두만강 일대에 사는 모련위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여진족의 한 부족인 울량합의 추장 아비차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조선을 침입하자, 조선은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로 임명하여 8천의 군사로 여진족을 정벌하게 했다. 2차에 걸친 정벌에서 조선은 대대적인 전과를 올리며 울량합족을 복종시켰다. 이후, 신숙주의 건의에 따라 무산지방을 조선의 영토로 포함시켜 이주민을 정착시킬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의 사관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리자 훈구파 이극돈은 이를 연산군에게 고했다. 조의제문은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대어 지은 글로서, 훈구파는 사림을 제거할 목적으로 연산군에게 알렸다. 그러자 평소에 사림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사형시키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등 사림파 선비들을 탄압했다.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관련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윤씨가 폐위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일을 알게 된 후, 이 일에 관계한 사람은 물론 이를 방관한 사람까지 모조리 찾아내 죄를 물었다. 또한 윤씨의 복위에 반대한 사람들도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입게 되었다.

 

경오왜변(1510년, 중종 5년)

삼포에 거류하던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

조선 건국 후, 왜인들과 무역거래가 늘어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에서만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했다. 그러자 왜인들의 활동이 엄격히 통제 되면서 왜인들의 불만이 커져 갔다. 이에 쓰시마 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들이 제포와 부산포를 함락하고 염포에 침입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으나 난동은 금방 제압되었다. 이후 조선은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들과의 통교를 중단했다. '삼포왜란'이라고도 한다.

 

임신약조(1512년, 중종 7년)

임신년에 조선과 쓰시마 도주 사이에 맺은 약조

삼포왜란 이후, 삼포가 폐쇄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된 쓰시마 도주는 조선과의 재통교를 요구했다. 이에 이전에 맺었던 '계해약조'보다 제약이 한층 더 강화된 조건으로 약조를 체결했다.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훈구파가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숙청한 사건

조광조 등 사림파들은 중종의 든든한 지지를 업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혁신정치를 폈다. 그러나 결국 중종마저도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신진사류들에게 부담과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신진사류의 세력확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가 희빈 홍씨와 짜고 '주초위왕(走肖爲王)', '주(走)'와 '초(肖)'를 합쳐서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음모를 꾸몄다. 결국 조광조에게 사형이 내려지는 등 수많은 사림파들은 숙청당하거나 유배당하면서 사림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신사무옥(1521년, 중종 16년)

안처겸의 모친상 때 조문록을 역모 가담자 명단이라고 무고한 사건

송사련, 정산 등은 안당의 아들 안처겸의 모친상 때 방문한 인사들의 방명록 명단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변했다. 이에 안당의 일가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후 선조가 즉위한 후 안당의 후손이 억울함을 상소하면서 이 일은 허위 사실로 밝혀졌고 처형을 당한 사람들은 누명을 벗었다.

 

을사사화(1545년, 명종 원년)

윤원형의 소윤파가 윤임의 대윤파를 제거한 사건

소윤파인 윤원형과 대윤파인 윤임은 모두 같은 파평 윤씨였으나 각각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를 내세우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심한 대립을 했다. 처음에는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윤임이 힘을 얻었으나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소윤파인 윤원형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자 윤원형은 윤임과 그를 따르는 세력을 모두 유배시켰고, 몇 년간 대윤파들을 숙청하며 탄압했다.

 

정미약조(1547년, 명종 2년)

사량진왜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1544년, 일본 전국시대의 내란을 틈타 왜인들이 사량진에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하며 사량진왜변을 일으켰다. 이에 조선은 '임신약조'를 무효로 하고 일본의 내왕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 측은 이를 사죄하며 국교 재개를 요청했고, 조선에서는 다시 일본인들의 내왕과 통교를 허용했다.

 

정미사화(1547년, 명종 2년)

윤원형의 소윤파가 대윤파의 잔존 세력을 숙청한 사건

1947년 9월, 선전관 이로와 부제학 정언각은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여왕이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라는 내용의 익명의 벽서를 발견했다. 이에 윤원형 등은 이것을 대윤파의 잔당들 탓으로 돌렸고, '을사사화' 때 화를 피했던 대윤파의 잔존 세력들과 사림 세력들이 대거 숙청당하기에 이르렀다.

 

 

을묘왜변(1555년, 명종 10년)

왜구가 조선정부의 통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전라도 일대를 침입한 사건

조선은 삼포왜란 이후 임신약조, 정미약조 등을 맺으며 왜구에 대한 무역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침입했다. 그러자 조선은 호조판서 이준경 등을 보내 왜구를 토벌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비변사의 권한을 확대하여 남해안과 제주 지역을 담당하게 했다. '을묘왜란'이라고도 한다.

 

계미삼찬(1583년, 선조 16년)

동인 중진인 송응개, 박근원,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려다 유배된 사건

이이는 붕당이 일어나고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심화되자 이를 중간에서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조치에 동인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연일 이이를 비판하며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동인의 중진인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귀양보내는 조치를 내렸다. 이후 이이는 서인을 대부분 등용했고,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기축옥사(1589년, 선조 22년)

정여립의 모반 혐의로 동인이 박해를 받은 사건

한준, 이축, 박충간 등은 동인의 중심인물인 정여립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월 활쏘기를 익히며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은 이 일로 3년간 박해를 받으면서 천 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1592년에서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 초반, 관군이 계속 일본군에게 패하면서 왕이 한양을 떠나 피난을 가는 등 한때 나라 전체가 큰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이 이어지며 일본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내면서 일본측에서 협상을 요청했다. 이후 협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97년에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했으나 1598년에 히데요시의 죽음을 구실로 모두 철수했다. 7년에 걸린 전쟁으로 온나라가 폐허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년)

임진왜란 휴전 교섭이 결렬된 후, 일어난 왜군의 재침략

임진왜란 화의가 진행되면서 침략해 온 왜군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왜장 가토 기요마사 등은14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차 침입했다. 그러나 이순신 등이 활약하며 왜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모두 철수했다.

 

 

기유약조(1609년, 광해군 1년)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일본과의 통교를 위해 맺은 강화조약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통교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이에 조선은 국서의 정식요구, 범죄인의 압송, 피로인 송환 등 3대 조건을 제시했고 일본이 여기에 응하면서 조약이 성립되었다. 쓰시마섬의 세견선을 20척으로 규정하고 사신의 접대나 벌칙을 정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계축옥사(1613년, 광해군 5년)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

광해군이 즉위한 후, 집권한 대북파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우두머리인 영의정 유영경을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이후에도 대북파는 자신들에게 계속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소북파들을 축출하고자 했다. 때마침 여러 서얼들이 신분차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은상인을 죽인 후, 은 수백 냥을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북파는 그들을 문초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내며 영창대군을 귀양보내고 반대파를 쫓아내며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계축화옥', '계축사화'라고도 한다.

 

계해반정(1623년, 광해군 15년)

서인이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린 사건

대북파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 했다. 또한 밖으로는 실리를 추구하는 중립외교를 지향하며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의 반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나고 능양군(인조)이 추대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인조반정'이라고도 한다.

 

정묘호란(1627년, 인조 5년)

조선과 후금 사이에 일어난 전쟁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며 후금을 자극했다. 그러자 후금은 광해군 폐위 문제를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후 양국은 정묘약조를 통해 강화를 맺고 형제의 나라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정묘노란'이라고도 한다.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청나라(후금)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나, 청나라는 더 나아가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에 강경한 자세를 취하자 청나라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했다. 이후 조선은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가는 등 형세가 불리해지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이로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의 군신관계를 맺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기해예송(1659년, 현종 원년)

효종의 사망 후,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두고 일어난 논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입을 상복에 관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은 효종은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고 주장하며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왕위에 올랐으면 첫째 아들로 인정된 것이므로 3년간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갑인예송(1674년, 현종 15년)

인선왕후의 사망 후,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두고 일어난 논쟁

인선왕후 장씨는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이다. 그가 죽자 자의대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붙었다. 당시 집권층인 서인은 기해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여겨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여겨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기해년에 일어난 예송까지 문제 삼으며 남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서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 결과 서인들이 실각하고 남인들이 실권을 차지했다.

 

경신환국(1680년, 숙종 6년)

서인이 남인을 대거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사건

남인의 우두머리였던 영의정 허적의 집에 조부인 허잠이 시호를 받은 것에 대한 잔치가 있었는데 그날 비가 오자 숙종은 임금이 쓰는 천막을 보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미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는 것을 알자 숙종은 크게 노했다. 이에 숙종은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요직을 서인으로 바꾸는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이후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복선군, 복창군, 복평군 형제와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면서 관련한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되었다. 이로서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경신사화', '경신출척', '경신대출척', '경신정변'이라고도 한다.

 

 

기사환국(1689년, 숙종 15년)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집권한 일

숙종은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궁녀 장옥정(장희빈)을 후궁으로 삼고, 이후 그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를 서인은 반대하고 남인이 찬성하면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아 죽는 등 탄압을 받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갑술환국(1694년, 숙종 20년)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에 관한 문제로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일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한 숙종은 갈수록 장씨의 방자한 행동에 환멸을 느겼다. 한편, 남인은 당시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던 주동자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 복위를 지지하면서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등용했다. 이에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되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게되었다. 이후 남인은 급격히 쇠퇴하여 다시는 집권하지 못했다. '갑술옥사' 또는 '갑술경화'라고도 한다.

 

기묘과옥(1699년, 숙종 25년)

과거 시험의 부정으로 일어난 대규모 옥사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기 위해 임시로 시행된 시험에서 34명이 합격했다. 그러나 시험지 바꿔치기 등의 부정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시험 자체가 무효가 되었다. 시험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병역 복무, 유배형 등에 처해졌다.

 

임인옥(1722년, 경종 2년)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해 소론이 노론을 숙청하고 실권을 잡은 사건

장희빈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연잉군(훗날의 영조)를 세제로 책봉하여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했다. 그러나 소론은 이를 노론의 불충으로 몰아갔고, 노론이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고 무고했다. 그 결과, 노론의 4대신을 포함한 수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신축년(1721년)에 시작하여 임인년(1722년)에 끝났다고 해서 '신임사화', 또는 '신임옥사'라고도 한다.

 

정미환국(1727년, 영조 3년)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정부의 인사를 개편한 일

영조는 극심한 당쟁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당파성이 강한 사람은 제거하고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하려 했다. 그러나 갈수록 노론이 중요 직책을 차지하게 되면서 노론은 소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고, '임인옥'에 대한 보복을 계속 고집했다. 이에 영조는 여러 노론들을 삭탈관직시키고 소론을 대거 기용했다. 이로서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을해옥사(1755년, 영조 31년)

윤지가 나주 객사에 붙인 벽서와 관련해 일어난 역모 사건

'신임사화'에 관여한 죄로 오랜 귀양살이를 했던 윤지는 노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은밀히 세력을 규합했다. 그리고 나주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여서 민심을 동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면서 윤지가 처형당하는 등 많은 소론파 인물들이 숙청당했고, 소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나주괘서사건' 또는 '나주괘서의 변'이라고 하기도 한다.

 

임오옥(1762년, 영조 38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

사도세자는 15세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조와 여러 갈등을 겪었다.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은 세자에게 약을 올릴 것을 권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영조 몰래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내관과 궁녀 여럿을 죽이는 등 비행을 저질렀다. 이런 일들이 쌓이자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임오화변', '사도세자사건'이라고도 한다.

 

신해박해(1791년, 정조 15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천주교도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모친상 때 신주를 모시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모친상을 지냈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남인은 이 문제로 천주교를 옹호하는 신서파와 천주교를 탄압하는 공서파로 나뉘어 대립했고, 이 문제는 정치적인 사안로 확대되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되면서 더 이상 그 사건은 확대되지는 않았으나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신서파와 공서파의 대립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신해사옥', '신해교난', '진산사건'이라고도 한다.

 

 

신유박해(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

18세기 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확산되고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등장하자 지배층은 큰 위협을 느꼈다. 이후,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박해령을 선포하고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훈, 정약종,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 100여 명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를 당했다. '신유교난', '신유사옥'이라고도 한다.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

기해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신유박해' 이후, 정권을 잡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약화되었다. 그러자 프랑스에서는 모방, 샤스탕, 앵베르 등 선교사 3명을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했다. 갈수록 천주교의 교세가 강해지자 조정에서는 박해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고, 이에 풍양 조씨가 중심이 되어 천주교를 탄압하며 70여 명의 카톨릭 교도를 처형했다. 이후 헌종은 척사윤음을 내리고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천주교를 탄압했다. '기해사옥', 또는 '기해교난'이라고도 한다.

 

경신박해(1859년, 철종 10년)

임태영이 약 9개월간 자행한 천주교도 탄압 사건

기해박해 때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의 아들 좌포도장 임태영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약탈과 방화 등의 불미스러운 일들로 동정 여론이 일어나 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집안의 김병기 등이 잘못을 지적하고 천주교도의 체포를 반대하면서 이를 주도한 임태영 등이 파면되었고 박해는 끝이 났다. '경신사옥', '경신교난'이라고도 한다.

 

임술민란(1862년, 철종 13년)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한 농민 봉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약화되어 전정·군정·환곡의 삼정이 문란해지고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가혹한 수탈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켰다. 백낙신은 잘못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군은 부정관리를 죽이는 등 6일 동안 그지역 토호의 가옥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리고 이후 민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수십 차례에 걸쳐 곳곳에서 일어났다.

 

병인박해(1866년, 고종 3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누적된 천주교에 대한 반감과 대원군의 정치적인 선택 등 다양한 요인이 맞물리면서 조선 정부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여 명의 가톨릭교도를 학살했다. '병인교난' 또는 '병인사옥'이라고도 한다.

 

병인양요(1866년, 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의 결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는 텐진에 있는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로즈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를 죽인 책임자를 엄벌하고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조선에게 요구했다. 나중에 프랑스는 강화도에서 철수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서적과 은괴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신미양요(1871년, 고종 8년)

미국 군함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해협에 침입한 사건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문책을 구실로 군함을 동원한 무력을 이용해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했다. 미국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를 탈환하는 등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목표로 했던 조선 개항에는 실패했다. 대원군은 이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하게 펼치며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병자수호조약(1876년, 고종 13년)

운요호(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불평등 조약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한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침입해 의도적으로 한일 간의 충돌을 일으켰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배상과 함께 수교를 요구했다. 그 결과 일본의 강압에 의해 불평등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되었고, 일본 식민주의 침략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임오군란(1882년, 고종 19년)

구식 군대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변란

개화정책에 따른 개혁으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구식군대인 무위영과 장어영의 군졸들은 크게 차별을 받으며 급료 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한달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마저 양은 부족하고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군병들은 선혜청 도봉소에서 난리를 일으키며 시작되었다. 이에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손에 넣었으나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후 일본과 조선은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갑신정변(1884년, 고종 21년)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급진파 개화당이 일으킨 정변

개화당은 임오군란으로 청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자 이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후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새로운 정부를 세우며 14개조의 정강을 공포했으나 청나라 군대에게 진압되며 3일 천하로 끝났다. 이에 개화당 수십 명이 피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는 한성조약을, 청나라와는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갑오농민전쟁(1894년, 고종 31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항거하며 일어난 농민운동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대해 항거하며 농민들과 전봉준 등 동학도가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이다. 한때, 관군을 무찌르는 등 그 위세가 대단했으나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며 실패로 끝났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농민 운동으로 조선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갑오개혁과 의병 투쟁 등으로 연결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라고도 한다.

 

 

갑오개혁(1894년, 고종 31년)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된 세 차례의 개혁 운동

동학농민운동 이후 개화파 세력이 정권을 잡아 3차에 걸쳐서 행해진 근대적 제도 개혁이다. 개화파가 정권을 잡은 후 재래식 문물제도를 근대식으로 고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대규모 혁신을 단행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했던 개화파들이 일본의 위세를 업고 추진한 개혁으로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제3차 갑오개혁은 을미개혁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을미사변(1895년, 고종 32년)

일본이 명성 황후를 시해한 사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등은 조선 내의 친러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후 친러파 등은 고종을 몰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을미사변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이라고도 한다.

 

을미개혁(1895년, 고종 32년)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이 실시한 개혁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이 일본의 위세를 업고 추진한 개혁이다.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소학교 설치, '건양' 연호 사용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아관파천 후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면서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한다.

 

을미의병(1895년, 고종 32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유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항일 의병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살해당하여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단발령이 시행되며 분노가 촉발되어 일어난 의병이다. 특히 유생들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의병의 중심축이 되었다. 이후 친일정권이 무너져 단발령이 철회되고, 왕이 해산 권고를 하면서 의병들은 대부분 해산했다.

 

을사늑약(1905년, 광무 9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 동맹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 대사로 군대를 동원하여 조약 인준을 강요했다. 이에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이 이에 찬성하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어 '늑약'이라고 한다. 이로서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을사오조약', '제2차한일협약', '한일협상조약'이라고도 한다.

 

정미칠조약(1907년, 융희 1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해 마지막 조치로 강행한 7개항의 조항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에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의 위임 등의 내용을 담은 각 조항의 시행에 관한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하며, 정미7조약 체결에 찬성한 내각 대신 7인을 정미칠적이라고 한다.

 

정미의병(1907년, 융희 1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은 서울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부대에 참여했다. 이처럼 무기를 가진 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의병의 전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전술도 다양해졌다. 그리고 전 계층이 항일의병에 참여하게 되면서 의병의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일부는 독립군이 되어 항일운동을 펼쳐나갔다.

 

경술국치(1910년, 융희 4년)

일제가 강제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일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 등을 거치며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었던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강제로 일본에 편입되었다. 경술국치는 '경술년에 있었던 국가적인 치욕'을 뜻하며 지금은 '국권피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미독립운동(1919년)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에 항거해 일어난 민족 독립운동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후 탑골공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후 전국과 해외로 확산되었으나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사용해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3·1운동(삼일운동)'이라고 부른다.

 

 

경신참변(1920년)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은 대규모 부대를 보내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독립군이 일본군이 공격하기 힘든 곳으로 이동하여 토벌에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청산리전투에서도 크게 패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여 가옥, 교회, 학교 등을 불태우며 3600여명의 한국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간도참변'이라고도 한다.

 

병인만세운동(19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

1926년 6월 10일,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례일을 기하여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으로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만큼 대규모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침체된 민족 운동에 활기를 안겨주며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했다. '6·10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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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일어난 일] 분야별 사건·사고

[2019년에 일어난 일] 분야별 사건·사고

2019년에 대한민국에 있었던 이슈(사건, 사고)에 대해 분야별로 정리해보았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2019년에일어난일
2019년 사건사고

정치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2019년 1월 24일

제15대 대법원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대법원장 구속이다. 그는 2011년 9월부터 6년 동안 대법원장으로 재임했던 그는 재판 개입과 인사 불이익 등 각종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되었다.

 

2차 북미정상회담

2019년 2월 27~28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가진 두 번째 정상회담이다. 싱가포르에서 가진 북미정상회담에 이어 8개월만에 성사되며 많은 관심을 끌었으나 제제완화와 관련하여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2019년 4월 11일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을 맞았다.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참고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이다.

 

패스트트랙 파동

2019년 4월 22~30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4월 22일 선거제 개편안과 공수처 설치, 검·경수사권조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할 것을 전격 합의했다. 자유한국당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회의가 열릴 수 있는 곳을 점거하면서 갈등이 극에 달했고 동물국회가 연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원들이 고발당하기도 했으며 결국 패스트트랙 지정이 가결되면서 국회파동은 끝이 났다.

 

남북미 판문점 회동

2019년 6월 30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기간 도중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제안에 북측이 화답하면서 돌발적으로 성사되었다. 이에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회동을 가졌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66년 만에 이루어진 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이기도 하다.

 

한일 경제분쟁

2019년 7월 1일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배상 판결 등 다양한 이슈로 한일 간의 외교적 마찰이 커지게 되면서 일본은 한국을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 등의 핵심 소재 수출 제한을 발표했고 결국 양국은 무역분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는 일본 불매운동, 지소미아 종료, 백색국가명단 제외 등으로 이어졌다.

 

조국 사태

2019년 8월 9일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조국이 여러 의혹과 논란에 휩싸이면서 대한민국이 조국을 지지하는 측과 조국을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국론 분열이 심화되었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시위와 대규모 집회는 계속 되었고, 결국 조국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안희정 대법원 판결

2019년 9월 9일

대법원은 자신의 수행비서를 성폭행하고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사회

씨그랜드호 광안대교 추돌

2019년 2월 28일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호 선장이 음주 상태로 요트와 바지선을 들이받은 후, 도주하는 과정에서 광안대교 하판 구조물과 추돌한 사고이다.

 

2019 강원도 산불

2019년 4월 4일

강원도 고성군 전봇대에서 발생한 불꽃이 강풍을 타고 번지면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다. 이 산불로 강원도 일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되고 피해지역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9년 5월 29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한국인 승객을 태운 유람선이 크루즈 선박과 충돌하여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이다. 탑승한 한국인 33명 중에 구조된 7명을 제외한 나머지 승객이 사망했다.

 

차량 번호판 자리 변경

2019년 9월 1일

자동차 번호판이 기존의 7자리에서 8자리로 변경되었다. 예를 들어, '65가4321'이 '765나4321'로 자동차 번호판의 형식이 바뀌게 되었다.

 

아프리카 돼지열병

2019년 9월 17일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로 전파된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생했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은 돼지과의 동물에만 전염되는 돼지 전염병으로 치사율이 최대 100%이며 치료제와 백신이 없으므로 일단 전염되면 100% 살처분한다.

 

이춘재 신상공개

2019년 12월 17일

영구 미제 사건이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이춘재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현재 다른 범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문화

기생충 황금종려상 수상

2019년 5월 25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201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기생충은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한국영화 최초의 쾌거를 이룩했다.

 

다음 연예 댓글 폐지

2019년 10월 31일

가수 설리 등 유명 연예인의 죽음에 포털 사이트의 악성 댓글이 주된 원인으로 밝혀지면서 카카오는 다음 연예뉴스 댓글창을 폐지했다.

 

양준일 열

2019년 12월 6일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3에 출연한 양준일의 외모와 말투, 연예계를 떠난 이유 등이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 연예계에 양준일 열풍이 불었다.

 

세계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2019년 4월 15일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목재로 만들어진 부분이 전소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대표적인 문화유산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며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에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홍콩 민주화 운동

2019년 6월 9일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 통과를 강행하려고 하자 홍콩인들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수많은 홍콩인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다.

 

IS 수괴 사망

2019년 10월 27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IS의 수괴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 CIA는 그의 위치와 그곳의 구조를 파악하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대규모 특수부대를 투입했고, 궁지에 몰린 알 바그다디는 자살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했다.

 

 

스포츠

FIFA U-20 결승 진출

2019년 6월 15일

대한민국 최초로 U-20월드컵 결승에 진출하여 3-1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결승 진출은 일본, 카타르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3번째이며, 아시아 최초로 결승에서 득점을 기록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이강인은 대회 골든볼을 수상했다.

 

호날두 노쇼

2019년 7월 26일

축구 명문구단 유벤투스FC의 내한으로 세계적인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뛰는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티켓이 전석 매진되었다. 그러나 호날두는 경기 내내 벤치를 지키면서 경기를 뛰지 않아 축구팬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많은 팬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기타

일반병사 휴대폰 사용 허용

2019년 4월 1일

군부대에서 시범적으로 운용되던 휴대전화 사용이 전 부대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장병들은 일과 후에 휴대폰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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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사건, 사태] 날짜로 보는 역사 정리

[한국 현대사 사건, 사태] 날짜로 보는 역사 정리

한국현대사정리
한국 현대사 정리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124군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이다. 이들은 경찰의 검문과정에서 정체가 탄로나자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히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양측에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31명 중에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은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28 대구 학생 시위》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여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의거이다. 당시 정부에서는 높은 지지를 받고 있던 야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일요일에 등교를 하도록 조치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학생들에 의해 시위가 발생했다. 이는 학생이 시위의 주체라는 점과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이후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15 부정 선거》

1960년 3월 15일

1960년의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에서 당시 집권하고 있던 자유당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대적인 선거부정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잇따른 경쟁 대선후보의 죽음으로 이승만은 단독 후보로 대선을 치르게 되면서, 부통령 선거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선거가 명백한 부정이라는 여러가지 정황이 드러나면서,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4·3 사건》

1948년 4월 3일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한 350여명이 제주도에 있는 12개의 경찰지서 등을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에서는 군 병력을 제주에 파견하여 대항하며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이루어졌다. 1949년 6월에 무장대의 총책이 사살되면서 소강사태에 접어들었다가, 다음 해 6·25전쟁이 발발한 후, 여러 죄목으로 학살이 자행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4·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호헌(護憲)은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1985년 총선 이후 대통령 간선제로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각계 각층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는 조치를 단행하고 1988년 2월에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호헌조치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부정선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전국적인 시위를 이른다. 처음에는 소규모의 시위가 이어지다가, 실종자로 처리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시위는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면서 제1공화국은 끝이 났다.

 

《4·27 판문점선언》

2018년 4월 27일

2018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판문점에서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합의하여 발표한 선언문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라고 부른다.

 

《5·16 군사 정변》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육군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군사 정변이다. 4·19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장면 내각이 붕되되면서 제2공화국은 끝이 났다. 반면에 실권을 잡은 박정희는 2년 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신군부 세력 퇴진, 계엄령 철폐, 민주 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대규모의 민주화 운동이다. 정부는 계엄군을 투입하여 강경 무력 진압을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는 1980년 5월 27일까지 이어지다가 결국 탱크를 앞세운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시위 기간 동안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여 한참이 지나서야 언론에 보도되었다.

 

《6·3 항쟁》

1964년 6월 3일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에 반대하여 일어난 시위이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국교정상화에 이은 대일청구권을 통해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야당과 학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이에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시위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1년 후 한일 수교가 성립되었다.

 

《6·10 민주 항쟁》

1987년 6월 10일

대통령 간선제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통해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는 날로 커져만 갔다. 그 외에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 사망 사건 등이 이어지면서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그 결과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6·15 남북 공동 선언》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 이후 두 정상 간의 합의한 내용을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6·15 남북 공동 선언은 통일문제 자주적 해결, 통일에 대한 공동의 노력, 이산가족 문제 인도적 해결, 남북 교류 활성화, 조속한 실무회담 개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6·23 평화 통일 선언》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이다. 평화적 통일에 대한 노력, 한반도 평화 유지, 남북대화 노력,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공산국가에 대한 관계 개선 추진, 우방국가와의 유대 관계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휴전이 되기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6·29 민주화 선언》

1987년 6월 29일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에 대한 저항으로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나며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당시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발표한 선언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8가지 항복의 민주화 조치 실현을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7월 4일

1972년에 있었던 남북 고위 정치 회담을 통해 작성한 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이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남북한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한 내용을 합의하여 발표한 것으로 총 7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주적인 통일, 평화통일, 민족 대단결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10·19 여수 순천 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의 일부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이들은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켜 여수, 순천 등을 장악했다. 이후,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반란군과 진압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또한 차지철 경호실장을 비롯한 5명도 현장에서 사망했다. 김재규의 대통령 살해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했으나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보안사령관 전두환, 제9사단장 노태우 등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 반란 사건이다. 당시 계엄 사령관이었던 육군 참모 총장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고 육군 본부를 점령하여 육군 지휘부를 무력화시켰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정승화의 연행의 재가를 받으면서 신군부 세력은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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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매국노]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대표적인 친일파]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대표적친일파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파 매국노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경술국적은 각각 을사년(1905년)과 정미년(1907년), 경술년(1910년)에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한 주요 사건에 찬성하고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파 매국노를 이르는 말이다. 이 사건들은 각각 을사조약(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경술국치로 불리고 있다.

 

 

을사오적이란?

1905년(을사년) 11월 17일, 일제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을사늑약, 정식명칭: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할 당시, 이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5명의 친일파 매국노 대신을 을사오적이라고 한다.

 

- 박제순(외부대신)

- 이지용(내부대신)

- 이근택(군부대신)

- 이완용(학부대신)

-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을사오적
을사오적

※외부대신: 외교에 대한 사무를 보던 외부의 최고 관직. 오늘날의 외교부 장관과 비슷.

※내부대신: 내무행정을 관장하는 내부의 최고 관직. 오늘날의 행정안전부 장관과 비슷.

※군부대신: 군사기관을 관장하고 군대를 총괄하는 군부의 최고 관직.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과 비슷.

※학부대신: 학무행정을 관장하는 학부의 최고 관직. 오늘날의 교육부 장관과 비슷.

※농상부대신: 농업과 상업, 공업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농상공부의 최고 관직.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산업통산자원부 장관을 합친 것과 비슷.

정미칠적이란?

1907년(정미년) 7월 24일, 고종을 퇴위시킨 후, 일제가 체결한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에 찬성한 7명의 친일파 매국노 대신을 정미칠적이라고 한다.

 

- 송병준(농상공부대신)

- 이병무(군부대신)

- 고영희(탁지부대신)

- 조중응(법부대신)

- 이재곤(학부대신)

- 임선준(내부대신)

- 이완용(내각총리대신)

 

정미칠적
정미칠적

 

※탁지부대신: 재무행정을 관장하는 탁지부의 최고 관직.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과 비슷.

※법부대신: 사법 행정, 경찰, 재판소를 총괄 감독하는 법부의 최고 관직.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과 비슷.

※내각총리대신: 국정을 총괄하는 내각의 수반, 최고위관직.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비슷.

 

 

경술국적이란?

1910년(경술년) 8월 29일,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한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하고 협조한 8명의 친일파 매국노를 경술국적이라고 한다.

 

- 이완용(내각총리대신)

- 윤덕영(시종원경)

- 민병석(궁내부대신)

- 고영희(탁지부대신)

- 박제순(외부대신)

- 조중응(법부대신)

- 이병무(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 조민희(승녕부총관)

 

경술국적
경술국적

친일파 분류

- 이완용: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해당

- 박제순: 을사오적, 경술국적에 해당

- 조중응: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해당

- 이병무: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해당

- 고영희: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해당

 

→ 그렇다고 해서 친일의 정도가 꼭 개수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외에도 수많은 친일파들이 있다.

 

 

일제에게 받은 작위

- 후작: 이완용

- 백작: 이지용, 송병준

- 자작: 조중응, 박제순, 민병석, 고영희, 권중현, 이근택, 윤덕영, 조민희, 이병무, 이재곤, 임선준

 

→ 을사오적, 정미칠적,경술국적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일제에게 작위를 받았다.

→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했으며, 송병준은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했다.

 

※조선귀족의 작위 등급

공작 > 후작 > 백작 > 자작 > 남작

 

※친일파 사망 나이

고영희(1849 ~ 1916년): 68세

권중현(1854 ~ 1934년): 81세

민병석(1858 ~ 1940년): 83세

박제순(1858 ~ 1916년): 59세

송병준(1857 ~ 1925년): 69세

윤덕영(1873 ~ 1940년): 68세

이근택(1865 ~ 1919년): 55세

이병무(1864 ~ 1926년): 63세

이완용(1858 ~ 1926년): 69세

이재곤(1859 ~ 1943년): 85세

이지용(1870 ~ 1928년): 59세

임선준(1860 ~ 1919년): 60세

조민희(1859 ~ 1931년): 73세

조중응(1860 ~ 1919년): 60세

 

→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해당하는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비교적 오래 살았으며, 1945년 해방되기 전에 전부 사망했기 때문에 본인들은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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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거지악, 삼불거, 삼종지도, 오불취 뜻과 유래

칠거지악, 삼불거, 삼종지도, 오불취 뜻과 유래

 

칠거지악, 삼불거, 삼종지도, 오불취

■ 칠거지악(七去之惡)

칠거지악이란 중국이나 한국 등 유교문화권에서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 가지 조건을 이르는 말이며,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유교적 전통사회의 이혼사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었으므로 정당한 이유 없이 아내를 쫓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이혼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아내가 칠거지악에 해당하면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다. 칠거지악과 그 밖에 아래에서 설명할 내용들의 상세한 내용은 공자가어(孔子家語), 대대례기(大戴禮記) 등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칠거지악(七去之惡)

① 불순구고(不順舅姑):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여자

② 무자(無子):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

③ 음행(淫行): 행실이 음탕한 여자

④ 질투(嫉妬): 질투하는 여자

⑤ 악질(惡疾): 나쁜 질병이 있는 여자

⑥ 구설(口舌): 말이 지나치게 많은 여자

⑦ 도절(盜竊): 도둑질하는 여자

 

 

결국,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행실이 음탕하거나 질투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하는 여자는 언제든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는 지금의 기준으로도 범죄가 되거나 이혼을 결심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몇 가지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도 있다. 이는 봉건적 가족제도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칠거지악

■ 삼불거(三不去)

삼불거란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잘못을 저지른 아내라고 해도 남편이 쫓아낼 수 없는 3가지 경우로 자신의 아내가 이에 해당하면 이혼할 수 없었다.

 

▲ 삼불거(三不去)

① 여공경삼년상불거(與共更三年喪不去)

- 시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른 경우

② 전빈천후부귀불거(前貧賤後富貴不去)

- 전에 가난했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경우

③ 유소취무소귀불거(有所取無所歸不去)

- 쫓아낸 후에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위의 삼불거에 해당하는 경우, 남편이 쫓아내는 경우에는 이에 따른 처벌을 받았고, 이혼을 한 후라고 해도 다시 결합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처럼 삼불거는 칠거지악으로 인한 이혼의 남용을 막고 어느 정도 아내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 나중에는 칠거(七去) 중에 무자(無子)와 질투(嫉妬)를 이혼사유에서 삭제하여 오거(五去)로, 삼불거(三不去) 중에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이혼을 금지하는 항목을 추가하여 사불거(四不去가 되어 오출사불거(五出四不去)가 생기기도 했다.

삼불거

■ 삼종지도(三從之道)

삼종지도란 유교 문화권에서 여자가 따라야 할 3가지 도리를 말한다. 이는, 고대사회에서는 여자는 남자에게 평생 복종하고, 종속되어 살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삼종지덕(三從之德), 삼종지의(三從之義), 삼종지례(三從之禮)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삼종지도(三從之道)

① 재가종부(在家從父)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따른다.

② 적인종부(適人從夫)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른다.

③ 부사종자(夫死從子):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

삼종지도

■ 오불취(五不取)

오불취란 유교 문화권에서 아내로 삼을 수 없는 5가지 경우를 말한다.

 

 

▲ 오불취(五不取)

① 역가자불취(逆家子不取) - 역적 집안의 딸

② 란가자불취(亂家子不取) - 음란한 집안의 딸

③ 세유형인불취(世有刑人不取) - 대대로 형벌을 받은 집안의 딸

④ 세유악질불취(世有惡疾不取) - 대대로 나쁜 병이 있는 집안의 딸

⑤ 상부장자불취(喪父長子不取) - 아버지가 없는 집의 장녀

 

※오불취의 경우, 아내로 삼을 수 없는 5가지 경우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남편으로 삼을 수 없는 5가지 경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오불취

유교사회의 여성 위치

고려 말부터 우리 생활에 뿌리 깊이 박히게 된 유교 문화권에서 남자와 여자의 위치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 유교사회를 지탱하고 이끌어 나가기 위한 필연적인 조치였다고도 볼 수도 있겠으나 여성으로서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집안에 유전적인 희귀 질환이 있어 유전이 걱정되거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역적 집안과의 결혼 같은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도 있고, 결혼을 망설일 만한 이유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은 여성의 인권이 많이 상승한 지금도 어느 정도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영향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밖에도 남녀차별과 관련한 사자성어나 유교사회에서 남녀의 위치를 엿볼 수 있는 단어들도 많다. 마지막으로 관련 단어들을 살펴보며 글을 마친다.

 

 

※참고. 남녀차별과 관련한 사자성어들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은 주장하고 아내는 이에 따른다.

 

여필종부(女必從夫)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라야한다.

 

남존여비(男尊女卑)

남자는 높고 귀하게 여기고 여자는 낮고 천하게 여긴다.

 

개가금지(改嫁禁止)

여성이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은 후에 재혼을 법으로 막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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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미국 대통령 영어로 Historical American Presidents

역대 미국 대통령 영어로


Historical American Presidents


오늘은 미국 역대 대통령 이름과, 임기, 그리고 그 대통령이 속한 당을 포스팅 하려고 합니다.


I am going to talk about historical American presidents' names, tenure, and what party the president is from.


미국 대통령 이미지


1. 조지 워싱턴 (1789. 4. 30 ~1797. 3. 4) 무소속


George Washington (April 30, 1789 ~ March 4, 1797) Independent party


2. 존 애덤스 (1797. 3. 4 ~ 1801. 3. 4) 연방당


John Adams (March 4, 1797 ~ March 4, 1801) Federalist Party


3. 토마스 제퍼슨 (1801. 3. 4 ~ 1809. 3. 4)  민주 공화당


Thomas Jefferson (March 4, 1801 ~ March 4, 1809) Democratic-Republican Party


4. 제임스 매디슨 (1809. 3. 4 ~ 1817. 3. 4) 민주 공화당


James Madison (March 4, 1809 ~ March 4, 1817) Democratic-Republican Party


5. 제임스 먼로 (1817. 3. 4 ~ 1825. 3. 4) 민주 공화당


James Monroe (March 4, 1817 ~ March 4, 1825) Democratic-Republican Party


6. 존 퀸시 애덤스 (1825. 3. 4 ~ 1829. 3. 4) 민주 공화당


John Quincy Adams (March 4, 1825 ~ March 4, 1829) Democratic-Republican Party


7. 앤드류 잭슨 (1829. 3. 4 ~ 1837. 3. 4) 민주당


Andrew Jackson (March 4, 1829 ~ March 4, 1837) Democratic Party




8. 마틴 밴 뷰런 (1837. 3. 4 ~ 1841. 3. 4) 민주당


Martin Van Buren (March 4, 1837 ~ March 4, 1841) Democratic Party


9. 윌리엄 헨리 해리슨 (1841. 3. 4 ~ 1841. 4. 4) 휘그당, *재임 중 사망함.


William Henry Harrison (March 4, 1841 ~ April 4, 1841) Whig Party * Passed away during his tenure.


10. 존 타일러 (1841. 4. 4 ~ 1845. 3. 4) 휘그당 → 무소속 


John Tyler (April 4, 1841 ~ March 4, 1845) Whig Party → Independent Pary


11. 제임스 K. 포크 (1845. 3. 4 ~ 1849. 3. 4) 민주당


James Knox Polk (March 4, 1845 ~ March 4, 1849) Democratic Party


12. 재커리 테일러 (1849. 3. 4 ~ 1850. 7. 9) 휘그당 *재임 중 사망함.


Zachary Taylor (March 4, 1849 ~ July 9, 1850) Whig Party * Passed away during his tenure.


13. 밀러드 필모어 (1850. 7. 9 ~ 1853. 3. 4) 휘그당


Millard Fillmore (July 9, 1850 ~ March 4, 1853) Whig Party


14. 프랭클린 피어스 (1853. 3. 4 ~ 1857. 3. 4) 민주당


Franklin Pierce (March 4, 1853 ~ March 4, 1857) Democratic Party




15. 제임스 뷰캐넌 (1857. 3. 4 ~ 1861. 3. 4) 민주당


James Buchanan (March 4, 1857 ~ March 4, 1861) Democratic Party


16. 아브라함 링컨 (1861. 3. 4 ~ 1865. 4. 15) 공화당 → 국민 연합당 *임기 중 암살 당함


Abraham Lincoln (March 4, 1861 ~ April 15, 1865) Republican Party → Kansallinen Kokoomus * assassinated during his tenure.


17. 앤드류 존슨 (1865. 4. 15 ~ 1869. 3. 4) 민주당, 민주 연합당


Andrew Johnson (April 15, 1865 ~ March 4, 1869) Democratic Party, Kansallinen Kokoomus


18.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1869. 3. 4 ~ 1877. 3. 4) 공화당


Ulysses Simpson Grant (March 4, 1869 ~ March 4, 1877) Republican Party


19. 루더포드 버처드 헤이스 (1877. 3. 4 ~ 1881. 3. 4) 공화당


Rutherford Birchard Hayes (March 4, 1877 ~ March 4, 1881) Republican Party


20. 제임스 아브람 가필드 (1881. 3. 4 ~ 1881. 9. 19) *임기 중 암살


James Abram Garfield (March 4, 1881 ~ September 19, 1881)  *assassinated during his tenure.


21. 체스터 알랜 아서 (1881. 9. 19 ~ 1885. 3. 4) 공화당


Chester Alan Arthur (September 19, 1881 ~ March 4, 1885) Republican Party




22. 스테판 그로버 클리브랜드 (1885. 3. 4 ~ 1889. 3. 4) 민주당


Stephen Grover Cleveland (March 4, 1885 ~ March 4, 1889) Democratic Party


23. 벤자민 해리슨 (1889. 3. 4 ~ 1893. 3. 4) 공화당


Benjamin Harrison VI (March 4, 1889 ~ March 4, 1893) Republican Party


24. 스테판 그로버 클리버랜드 (1893. 3. 4 ~ 1897. 3. 4) 민주당


Stephen Grover Cleveland (March 4, 1893 ~ March 4, 1897) Democratic Party


25. 윌리엄 매킨리 (1897. 3. 4 ~ 1901. 9. 14) 공화당 * 임기 중 암살


William McKinley, Jr. (March 4, 1897 ~ September 14, 1901) Republican Party * assassinated during his tenure.


26. 티어도어 루즈벨트 (1901. 9. 14 ~ 1909. 3. 4) 공화당


Theodore Roosevelt (September 14, 1901 ~ March 4, 1909) Republican Party


27.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1909. 3. 4 ~ 1913. 3. 4) 공화당


William Howard Taft (March 4, 1909 ~ March 4, 1913) Republican Party


28. 토마스 우드로 윌슨 (1913. 3. 4 ~ 1921. 3. 4) 민주당


Thomas Woodrow Wilson (March 4, 1913 ~ March 4, 1921) Democratic Party




29. 워렌 가맬리엘 하딩 (1921. 3. 4 ~ 1923. 8. 2) 공화당 *임기 중 사망


Warren Gamaliel Harding (March 4, 1921 ~ August 2, 1923) Republican Party *Passed away during his tenure


30. 존 칼빈 쿨리지 (1923. 8. 2 ~ 1929. 3. 4) 공화당


John Calvin Coolidge, Jr. (August 2, 1923 ~ March 4, 1929) Republican Party


31. 허버트 클락 후버 (1929. 3. 4 ~ 1933. 3. 4) 공화당


Herbert Clark Hoover (March 4, 1929 ~ March 4, 1933) Republican Party


32. 프랭클린 딜라노 루즈벨트 (1933. 3. 4 ~ 1945. 4. 12) 민주당 *임기 중 사망


Fraanklin Delano Roosevelt (March 4, 1933 ~ April 12, 1945) Democratic Party *Passed away during his tenure 


33. 해리 S. 트루먼 (1945. 4. 12 ~ 1953. 1. 20) 민주당


Harry S. Truman (April 12, 1945 ~ January 20, 1953) Democratic Party


34.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1953. 1. 20 ~ 1961. 1. 20) 공화당 *3 선 금지법 최초 적용


Dwight David Eisenhower (January 20, 1953 ~ January 20, 1961) Rupublican Party *The first President who was applied by Prohibition three terms consecutively


35. 존 F. 케네디 (1961. 1. 20 ~1963. 11. 22) 민주당 *임기 중 암살 당함


John Fitzgerald Kennedy (January 20, 1961 ~ November 22, 1961) Democratic Pary *Assassinated during his tenure




36. 린든 B. 존슨 (1963. 11. 22 ~ 1969. 1. 20) 민주당


Lyndon Baisnes Johnson (November 22, 1963 ~ January 20, 1969) Democratic Party


37.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1969. 1. 20 ~ 1974. 8. 9) 공화당 *사임


Richard Milhous Nixson (January 20, 1969 ~ August 9, 1974) Republican Pary *Resigned


38. 제럴드 루돌프 포드 (1974. 8. 9 ~ 1977. 1. 20) 공화당


Gerald Rudolph Ford, Jr. (August 9, 1974 ~ January 20, 1977) Republican Party


39. 지미 카터 (1977. 1. 20 ~ 1981. 1. 20) 민주당


Jimmy Carter, Jr. (Junuary 20, 1977 ~ January 20, 1981) Democratic Party


40. 로날드 레이건 (1981. 1. 20 ~ 1989. 1. 20) 공화당


Ronald Wilson Reagan (January 20, 1981 ~ January 20, 1989) Republican Party


41. 조지 H. W. 부시 (1989. 1. 20 ~ 1993. 1. 20) 공화당


George Herbert Walker Bush (Jaunary 20, 1989 ~ January 20, 1993) Republican Party


42. 빌 클린턴 (1993. 1. 20 ~ 2001. 1. 20) 민주당


Bill Jefferson Clinton (January 20, 1993 ~ January 20, 2001) Democratic Party




43. 조지 W. 부시 (2001. 1. 20 ~ 2009. 1. 20) 공화당


George Walker Bush (January 20, 2001 ~ January 20, 2009) Republican Party


44. 버락 오바마 (2009. 1. 20 ~ 2017. 1. 20) 민주당


Barack Hussein Obama Jr. (Jaunary 20, 2009 ~ January 20, 2017) Democratic Party


45. 도널드 트럼프 (2017. 1 . 20 ~ 현재 대통령) 공화당


Donald John Trump (January 20, 2017 ~ Now on going) Republican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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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언급된 인물들 소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언급된 인물들 소개


위인이라고 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전혀 아닌 사람들도 있으나, 국민학교 시절부터 많이 불렀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언급된 인물들을 간단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이미지


1. 단군 - 고조선 건국


2. 동명왕 - 부여의 시조, 고구려를 세운 주몽왕과 동일 인물로 보는 설이 있음


3. 온조왕 - 고구려 왕자이자 소서노의 둘째 아들로 백제를 건국한 인물


4. 박혁거세 - 신라의 시조이며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5. 광개토대왕 - 고구려 19대 대왕이며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여 주변 나라들을 굴복 시킨 정복자. 


6. 김이사부 - 신라 시대의 명장으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던 중고기 시대 주변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대가야를 멸망시킨 인물.


7. 백결선생 - 삼국 시대의 몇 안되는 예술가로, 거문고의 명인이었다. 가난해서 항상 꿰멘 옷을 입었으며, 대악 (방아 타령)을 작곡한 사람이다.


8. 의자왕 - 백제의 마지막 왕. 삼천 궁녀를 거느리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다 백제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승자의 입장 (신라, 당) 에서 쓴 역사일 가능성이 많으며, 재위 중반 까지는 신라를 몰아붙이면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이 왕이며, 백제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왕이기도 하다.


9. 계백 - 황산벌에서 전사한 백제의 마지막 명장. 적국인 신라의 화랑인 관창을 보고 어린 소년이 뛰어나다며 한 번 풀어준 적이 있는 대인배.


10. 관창 - 신라의 화랑으로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백제 계백 장군과 맞서 싸운 인물로, 계백 장군이 한 번 풀어주었으나 두 번째 잡혔을 때는 목이 베인다.


11. 김유신 - 멸망한 가야의 왕족 출신으로, 신라 장군으로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 문무왕, 이렇게 5 명의 신라 왕을 섬기며, 크고 작은 전쟁에서 이기며 통일 신라를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여러 외교적 위기 속에서 신라를 구하기도 한 신라의 영웅.


12. 문무왕 - 한반도 최초로 삼국을 통일한 통일 신라의 군주이자 뛰어난 전술가.


13. 원효 대사 -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해골물을 마시고 "모든 일은 마음 먹기 달렸다" 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유명한 삼국 시대 말엽의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14. 혜초 -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이자 인도로 가서 승려 금강지의 제자가 된 후, 중앙아시아 지역 및 페르시아 지역까지 여행한 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인물.




15. 장보고 - 통일신라 시대의 군인이자 호족으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한 인물로, 동아시아 해상에서 국제적으로 무역과 상업, 또한 군사력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통일신라의 영웅.


16. 대조영 - 발해를 건국한 인물로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내려와 거란, 말갈족을 흡수하여 만든 나라이다.


17. 강감찬 - 고려 시대의 신하로 거란족을 퇴치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인물. 


18. 서희 - 고려 문신으로 외교로 유명하다. 거란의 소손녕과의 기 싸움에서 이긴 외교 담판으로 잘 알려진 인물.


19. 정중부 - 고려의 무신으로 무신들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무신정변을 일으켰으며, 무신정권 시대의 두 번째 집권자이자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한 인물. 


20. 최무선 - 고려말과 조선초의 장수로 화포를 최초로 개발한 인물로 왜구들을 화포로 무찌른 진포해전으로 유명.


21. 죽림칠현 (산도, 왕융, 유영, 완적, 완함, 혜강, 상수) -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에 정치와 속세에 등을 돌리고 언제나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긴 일곱명의 인물들. 그들의 중심 인물은 혜강과 완적 두 사람이었다. 전통적 유교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많이 했으며, 7명의 선비가 몰려 다니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인들이며 한국을 빛낸 인물에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22. 김부식 - 삼국사기를 기록한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이며,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문신 권력자로,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3. 지눌국사 - 고려의 승려로 불교 종파들을 통합하여 조계종을 창시하였다. 


24. 의천 - 고려의 승려로 원래 왕자였다. 최초의 본격적인 화폐 유통을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불교를 천태종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5. 이종무 - 조선 세종대왕 시대 대마도를 정벌한 인물.


26. 정몽주 -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자 유능한 인재. 이방원의 하여가에 단심가로 회답하여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전했다. 결국 이방원에게 선지교에서 살해된다.


27. 문익점 - 고려 말의 유학자로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밀수해 조선 시대 의복에 큰 변화를 일으킨 인물.




28. 최충 -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9재 학당을 창립해 쇠퇴하고 있던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대신하고자 하였으나, 후에 붕당정치의 씨앗이 되기도 함.


29. 일연 - 고려시대 승려로 원효대사와 동향이며, 삼국유사를 집필했다.


30. 최영 - 고려 말 문신, 최후의 명장이자 충신. 청백리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유배되고 고문 받고 처형 당했다.


31. 황희 - 고려 말 조선 초 시대의 문신으로 24년간 정승 자리에 있었고, 그렇게 한데는 세종대왕의 요청이 있었다. 세종대왕과 함께 태평성대를 열었고 존경 받는 유능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뇌물을 좋아하여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몇 차례 탄핵 위기를 겪었다.


32. 맹사성 - 황희와 함께 조선 시대 대표적 명재상. 청렴 결백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강호사시가를 만들기도 했다.


33. 장영실 -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 활약한 과학자이자 기술자. 간의, 앙부일구, 옥루, 자격루, 혼천의, 일성정시의, 그리구 측우기를 발명한 인물.


34. 신숙주 - 조선시대의 정치가, 외교관. 세조가 왕이 될 때 계유정난과 단종의 퇴위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지탄을 받은 인물. 그러나 국조보감, 동국통감 집필에 참여한 학자 중 한 사람이며, 농산축목서를 집필. 여진족 징벌과 일본 지도를 제작한 업적이 있다.


35. 한명회 - 조선 시대의 권신. 수양대군의 참모로 총애를 받아, 두 왕의 장인이 되는 등 엄청난 권력을 누림. 하지만 모략가로서 매우 뛰어난 면모를 보임.


36. 이율곡 -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 시대의 대표적 천재로 알려져 있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음. 오천원 지폐 모델.


37. 이퇴계 - 조선 시대 유학자. 천원 지폐의 모델. 대 학자로서 존경 받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 드문 좋은 남편이자 부부 관계에 대한 많은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38. 신사임당 - 조선 시대 예술가이자 지식 여성.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며, 오만원 지폐 모델이기도 함. 글쓰기와 그림 실력이 탁월했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학문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39. 곽재우 - 조선 시대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으로 활약한 의병장.


40. 조현 - 조선 시대의 문신 출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


41. 김시민 -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최고의 명장. 진주 대첩으로 화려하게 활약했으며 장렬히 전사.


42. 이순신 -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임진왜란 때의 영웅. 전술에 밝고 강직한 충신. 거북선을 제작하여 왜구를 무찔렀던 구국영웅. 전쟁 중 기록한 난중일기로 유명하며 한산도 대첩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해전들을 매우 열세한 아군의 군대로 적군을 박살낸 인물. 




43. 태정태세문단세 -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등 조선의 왕을 가리키는 말.


44.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죽은 사람들.


45. 생육신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온 or 권절) - 세조가 반정을 일으키자 속세를 떠나 벼슬을 버리고 미친척 하거나 장애가 있는 척 하며 단종을 추모한 인물들.


46. 논개 - 조선시대 진주 출신 관기로 알려져 있다. 황진이와 더불어 유명한 기생. 왜군이 침략했을 때 손가락에 반지 10개를 끼고 적장을 꼭 안고 절벽으로 떨어짐.


47. 권율 - 조선 시대 문신이자 무관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 산성에서 행주대첩으로 유명.


48. 홍길동 - 도술을 부릴 수 있는 허균의 홍길동전 주인공. 부패한 관리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분신술로 유명. 서얼 출신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한이 많음. 놀랍게도 실제 홍길동이 존재 했는데, 그는 인맥을 잘 활용한 머리 좋은 도적으로, 서얼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도적으로 빠진 인물이라고 한다.


49. 임꺽정 - 조선시대 백정 출신 도적으로, 유명한 사극 여인천하의 배경인 문정왕후와 정난정이 섭정하던 시대에 활약한 인물. 관군과 싸워 수차례 이겼으며, 반란을 일으켜 조선 정부를 위태롭게 하기도 했던 뛰어난 인물.


50.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 - 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결사항전을 주장하다 끌려가 사형당한 인물들. 


51. 박문수 - 조선 시대의 문관으로, 백성을 대변하여 바른 말을 잘 하고, 가끔씩 선을 넘기도 해서 많은 지탄을 받았는데, 영조가 아껴서 감싸준 인물. 대표적 암행어사로 알려져 있다.


52. 한석봉 - 조선시대 3 대 명필 중 한명. 어둠 속에서 떡을 써는 어머니와 글씨로 대결을 벌인 일화로 유명. 


53. 단원 김홍도 -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로 풍속화로 유명하며 다양한 그림들을 남겼다.


54. 김삿갓 (김병연) -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갓을 쓰고 방랑하며 돌아다녔다. 김병연은 안동 김씨로, 할아버지 김익순이 왕을 속인 죄로 처형 당하고, 아버지도 화병으로 돌아가셔서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었다. 그런 이유로 평생 방랑하며 살았다는 설이 있다.


55. 김정호 - 조선 말기의 지리학자이자 대동여지도를 그린 인물.


56. 영조 - 조선의 21대 왕. 붕당정치의 폐단을 완화하기 위해 탕평책을 내는 등 정치적으로 밝은 인물이었으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냉혈한으로 알려져 있다. 또 83살까지 장수하고, 소식하며, 소박한 생활을 강조했던 왕이다. 그래서 여성들의 가체를 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등의 정치를 펴며, 태평성대를 이끈 왕이기도 하다.


57. 정조 - 조선시대 22대 왕. 영조와 함께 조선 최후의 태평성대를 연 왕이다. 학식이 매우 높아 신하들을 종종 기죽이기도 했다.


58. 정약용 - 조선의 문신. 뛰어난 실학자.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살인 사건을 해결, 법의학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 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초기 천주교 신자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유배를 당하기도 한다.


59. 전봉준 - 녹두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60. 김대건 -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 기독교를 박해했던 조선시대에 혹세무민 했다는 죄명을 얻고 순교 당함.




61. 황진이 - 조선 전기의 기생이자 논개와 함께 가장 유명한 명기로 알려져 있다. 시인이자 예술가, 사서삼경을 독파한 지식 여성이기도 함. 천마산의 지족선사를 파계 시키고, 벽계수를 무너뜨린 일화로 유명. 서경덕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자 감탄하며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고 함.


62. 홍경래 -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인물. 과거에 떨어진 후 세도정치 등의 비리와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


63. 김옥균 - 조선 말기 고종 때 대표적인 개화파로 프랑스식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에 그침.


64. 안중근 -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 지도자이자 계몽 운동가. 천주교 신자로 도마 안중근이라고 불리기도 함.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10가지 죄악을 읊은 바 있다. 


65. 이완용 - 매국노의 끝판 왕. 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이완용 이외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고종 강제 퇴위를 추진하며, 정미칠적에 포함되기도 하는 등 매국노 중의 매국노라고 볼 수 있다. 


66. 윤동주 - 일제 강점기의 항일 민족 시인. 독립운동가. 명시 별 헤는 밤으로 유명.


67. 지석영 - 조선 말기의 의사이자 국문학자. 종두법을 연구해 보급하려고 노력, 천연두 퇴치에 힘을 씀. 친일 논란이 있음.


68. 삼십삼인 - 3.1운동을 주도하며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33인으로,  국민들과 학생들이 '조선독립 만세' 라는 구호를 외치게 선동함.


89. 손병희 - 독립운동가,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의 총 지휘자로 활약. 애국지사들이 세운 사립 학교를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70. 유관순 - 만세 운동에 참가한 대표적 인물로 일본군에게 잡혀 참혹하게 고문 받고 살해되었다.


71. 안창호 -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 실력 양성"을 내걸고 민족 계몸운동을 펼쳤다.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을 설립했으며, 흥사단은 이후에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72. 방정환 - 독립 운동가이자, 어린이 교육과 인권을 위해 노력한 사회운동가.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어린이 문학서를 많이 집필했다.


73. 이수일과 심순애 - 흠... 한국을 빛낸 위인에 속하기 보다는 그 당시 국민 신파극 제목이자 주인공이였다. 김중배와 이수일 그리고 여주인공인 심순애가 벌이는 삼각관계 내용이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 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74. 김두한 -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건달이며 한국 1세대 조폭 두목으로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된 인물.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경험했던 인물이다. 독립 운동가 김좌진의 서자라 하여 장군의 아들로 불리며, 안재모씨가 떠오른다.


75. 이상 -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아방가드르 시인이자 소설가. 대표작 나비로 유명하다.


76. 이중섭 - 대한민국의 서양화가. 황소라는 작품으로 유명.


언급 되었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76명인 것 같지만, 33인, 태정태세문단세, 사육신 등과 같이 묶여서 나온 경우가 있으므로 다 세어보면 100명이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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