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같은 전쟁(War like a Picnic) - 미서전쟁 :: 미스터 션샤인 역사적 배경

[미스터 션샤인 역사 배경]


소풍 같은 전쟁(War like a Picnic)


극 중, 유진의 상사 카일의 책상 위에 있는 1901년 11월 12일 자 신문 기사 제목의 일부인 ‘소풍 같은 전쟁(War like a Picnic)’은 실제로 한 비평가가 사용한 표현으로,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벌어진 ‘미서전쟁’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스페인의 한자 표기는 ‘서반아(西班牙)’로 미국과 서반아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1823년 이후 ‘먼로 선언’을 외교 방침으로 하여 지구의 서쪽 절반을 간섭하지 말라는 미국신대륙에 방대한 식민지를 소유한 스페인이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미서전쟁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를 두고, 계속해서 식민 통치를 이어가려는 스페인과 거리 상 가까운 쿠바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며 입지를 넓히려는 미국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1895년,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대한 불만으로 쿠바는 스페인에 대항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1898년, 이에 미국은 쿠바 내 자 국민 보호를 위해 전함 ‘메인(Maine)호’를 쿠바에 파견했는데 2월 15일, 메인호는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로 250명이 넘는 미군이 사망하였다. 미국 여론은 스페인을 의심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1895년 4월 20일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스페인도 이에 맞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과 스페인 간에 ‘미서전쟁’이 발발했다. 




쇠퇴하고 있는 과거의 강대국 스페인과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미국의 전쟁은 4개월 만에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며 혹자는 ‘소풍 같은 전쟁’ 에 비유하기도 했다. 수백 년 간 초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던 스페인은 사실상 신대륙 지배를 마감하며 몰락했고 반면에, 미국은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게 되어 오늘날 ‘경찰 국가 미국’의 시발점이 되었다. 


극 중의 신문 발행 일은 1901년 11월 12일 인데, 이는 전쟁이 끝난 후로 3년이 지난 시점이다. 다만, 기사에 1898년 12월 10일이 나오는데 이 날은 ‘파리 조약’이 체결된 날이며 이 조약으로 스페인은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등을 미국에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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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과 그 후손들

을사오적과 그 후손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당시 조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고종이 불참한 회의에서 8명의 대신 중에 5명이 찬성하자 일본은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당시,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을 했던 사람은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이 을사조약에 찬성하였다. 이 외에 참정대신 한규설, 법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머지 3명 중 이하영과 민영기도 변절 하여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 이후 작위를 받았다. 이하영은 자작, 민영기는 남작 작위를 받아 결국, 한규설을 제외한 7명이 작위를 받았다. 한규설은 체결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로 반대를 했음에도 원망과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당시 일본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으며 끝까지 조약 체결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로 한일 강제 병합이 된 후, 일본이 준 남작 작위를 끝까지 거부하기도 했다.


을사오적과 그 후손들

영상으로 보실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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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학부대신 이완용 -


이완용


이완용은 이중 가장 높은 ‘후작’ 작위를 받았고 을사조약 이외의 큰 사건들에도 관여하였다. 1907년에는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의 양위를 주도하고 순종을 즉위 시켰으며, 반일 단체에 의해 그의 집이 불타기도 했고 정미 7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칠적이 되며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합될 때도 한일 병합 조약에 찬성한 경술국적이기도 하다. 


2018/10/30 -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비난, 경고하면서 일본에게는 탄압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여러 친일적인 행동과 정책을 펴며 친일파 중에서도 처단해야 할 1 순위로 꼽혔다. 1909년, 명동 성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에게 피습 당해, 폐가 관통 되는 등 칼로 3군데를 찔리면서 그는 치명상을 입었고 생사에 기로에 섰으나 일본 외과의들이 최고의 의료 기술을 동원하면서 이완용은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당시, 그가 수술 받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이 때 생긴 폐 질환으로 평생 고생하다가 17년 뒤인 1926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또한, 그의 친일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아들, 손자, 사돈 등 친인척 수십 명에 이르렀고 그 중, 손자가 그의 후작 자리를 계승하는 등 일본에게 작위를 받은 사람 만 해도 5명이었다. 나중에 이완용 등 친일파 재산을 환수했으나 이는 쉽지 않았고 결국 환수한 재산은 적었다. 그의 증손자는 소송으로 그의 땅을 되찾아 팔고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당시 30억 원 상당)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


권중현


권중현은 을사조약 찬성으로 을사오적이 되었고 그 공로로 일본에게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이른 나이에 일본어를 습득, 통달하면서 일찍 부터 친 일본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이후, 친일 성향의 개화파에 가담하는 등 여러 모로 대표적인 일본 통으로 활동한 경력으로 을사오적에 이름을 올린 것도 당연시 될 만큼, 처음부터 계속 일본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을사오적이 된 후, 여러 차례 목숨을 위협 받아 외출할 때는 항상 일본군을 대동 하고 다녔다. 1907년, 을사오적 암살단이 그를 습격했으나 암살이 미수에 그치면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또한, 의병을 탄압하는 등 꾸준한 친일 행동으로 일본 제국에게 수 차례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19년, 일본에 항거 하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작위를 반납하려 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말년에는 비교적 편안한 삶을 보내며 지냈고 1934년 , 8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외부대신 박제순 -


박제순


박제순은 을사조약을 서명한 실제 당사자로 을사오적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체결 당시, 대한제국 외부 대신의 자격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조약을 조인하며 을사조약에 찬성한 나머지 을사오적과는 달리 실제 을사조약 체결의 당사자로 기록되었다. 보통, 이완용이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이긴 하지만 을사오적 중에서는 박제순이 가장 중죄인에 해당한다. 




고종의 위임장이 없이 박제순의 날인만 있어 을사조약의 효력이 없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이후, 반대한 한규설에 이어 참정대신이 되었고 이완용의 내각에서는 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10년의 한일 병합 조약에도 찬성하며 5명의 을사오적 중에서도 이완용과 함께 경술국치를 주도한 ‘경술국적’ 8인에도 포함되며, 우리나라 국민들의 많은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협력하며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그 공로로 일본에게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별다른 탈 없이 나머지 생을 살다가 1916년 59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도 친일파 관리로서 활동하였는데, 손자인 박승유는 이들과 다른 행보를 걸었다. 아버지의 지시로 일본군에 입대한 박승유는 평소 가족의 친일 행각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에, 몰래 탈영하여 독립군에 입대하였으며, 독립군에서 음악의 소질이 있었던 특기를 살려 애국가, 가곡 등을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 시켰고 독립군을 모으는 역할을 하며 심리전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자원 입대를 하기도 하며 나중에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박제순은 손자인 박승유가 독립 운동을 하자, 박승유의 이름을 가문에서 빼버리기도 했다.


- 군부대신 이근택 -


이근택


이근택은 을사오적이 된 후, 많은 지탄을 받았으나 경술국치 후, 일본에게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임오군란 때 피난 온 명성황후에게 매일 싱싱한 생선을 잡아 바쳐 발탁되었고 어느 날, 우연하게 일본 상점에 들렀다가 살해 당한 피 묻은 명성황후의 띠를 발견해 엄청난 거금을 주고 구매하여 고종에게 바쳐서 고종과 세자에게 신임을 얻어 중앙에 진출했다. 친러파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하자 친일파로 선회하여 을사조약 체결이 되기 전, 이미 그는 친일파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특히, 경위원 총관, 헌병 사령관 등, 군사 분야와 관련한 직책을 주로 맡았으며 을사조약 전에는 군부 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1906년에는 기산도 의사의 습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치며 목숨을 겨우 부지하기도 했다또한, 그의 친형인 이근상이 ‘남작’ 작위를, 그의 동생인 이근호도 ‘남작’ 작위를 받았고, 그들의 아들들도 그들의 귀족 작위를 계승하면서 가문에서 무려 6명의 일본 귀족이 나왔다. 참고로, 1997년 이완용 증손자가 승소하면서 친일파 후손의 재산 반환 관련 판례가 생겨, 한 때,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이 급격히 증가했고 많은 소송에서 친일파들이 승소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그 중에서 이근택의 동생인 이근호의 후손은 국가 상대로 소송을 수 차례 진행하기도 했다.


- 내부대신 이지용 -


이지용


이지용은 1905년, 을사조약에 찬성한 공로로 경술국치 후, 일본에게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재긍(흥선대원군 형의 아들)에게 입양되어 고종 황제의 오촌 조카로서 왕족에 편입되었다. 1904년, 외부 대신 서리로서 일본 공사 하야시와 한일 의정서를 체결한 조약 체결의 당사자로서 한일 의정서를 주도하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죄로, 분노한 군중에게 그의 집이 불타기도 하였다. ‘을사오적 암살단’은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권중현 암살이 미수에 그친 것이 보고되어 그의 암살을 막기 위해 병사들이 호위하면서, 을사오적 암살단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을사오적이 된 후, 친일 행각은 계속 되었으나 1907년, 우리나라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이지용을 협박, 회유하면 이를 막으려고 한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를 따르지 않았고, 같은 해, 정미조약 체결에도 나서지 않으며 친일 관련 핵심 사안에서는 나서지 않았다. 이후, 이지용은 심각한 도박 중독자가 되었는데 친일로 모은 수많은 재산을 통째로 날렸고, 한 때, 일본 귀족의 작위가 정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도박을 계속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28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백작 작위는 그의 양손자가 물려받았다.


을사오적과 그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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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여자들 下 (손노반, 왕이, 채염, 장춘화 등)

삼국지의 여자들 下 

(손노반, 왕이, 채염, 장춘화 등)


- 장춘화(張春華) -


장춘화


사마의의 아내로 사마사, 사마소의 모친이다. 꾀병을 핑계로 조조의 부름을 거절한 사마의가 여종에게 꾀병을 들키자 장춘화는 여종을 죽여 입막음을 하였고, 여종을 대신해 집안일을 하며 사마의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녀가 나이가 들자 첩인 백부인을 총애하여 장춘화를 보지 않았다. 사마의가 병이 들자 장춘화는 문병을 갔는데 늙은이 취급을 당하자 그녀는 단식을 시작했고, 자식들도 장춘화와 함께 단식에 동참하면서 궁지에 몰린 사마의는 그녀에게 사과하였고 이후, 아내에게 사과한 것은 자식 때문이라며 아내에 굽힌 것에 대해 자식 핑계를 댔다. 이렇듯 그녀의 일화 들은 모두가 인상 깊고 사마의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의 여장부였다. 그녀가 죽고 손자인 사마염이 황제에 올랐고 할머니인 장춘화를 선목황후로 추대하였다.


- 채염(蔡琰) -


채염


채염은 후한의 대학자였던 채옹의 딸로, 삼국지 여인들 중에서도 기구한 삶을 살았다. 위중도와 혼인했으나 요절하며 과부가 되었고, 채옹은 동탁의 죽음에 탄식하다 죽임을 당했다. 이후, 채염은 흉노족이 쳐들어와 납치되어 흉노왕의 첩으로 지내며 아들 둘을 낳았다. 조조는 채옹의 후사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여 흉노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채염을 데려왔다. 이후, 풀려 나온 채염은 동사와 재혼하였고, 동사가 법을 어겨 사형 당할 처지에 놓이자 조조에게 가서 사형 집행을 멈추기도 했다. 또한, 소실되었던 채옹의 저서 400 여 권을 도움 없이 혼자서 완벽히 복원해 내는 등, 채옹의 자식 다운 영특함을 보이기도 했다. 연의에서도 조조와 함께 채옹이 쓴 유언장의 수수께끼를 풀며 남다른 머리를 자랑한다.


- 왕이(王異) -


왕이


조앙의 아내이자 조월과 조영의 모친으로, 조앙이 위강의 수하일 때, 마초에게 포위 당하자 왕이는 활을 쏘며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성이 함락돼 위강은 마초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왕이는 조앙에게 복수를 종용하였으며 복수를 위해 마초의 신임이 필요했던 그녀는 마초의 아내 양씨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샀고, 이로 인해, 조앙도 마초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아들인 조월이 인질로 잡혀있었던 탓에 조앙은 마초에게 복수하는 것을 망설였으나, 왕이는 자식의 목숨보다 복수가 중요하다며 조앙을 설득하였고, 조앙이 이를 따르게 되어 함께 힘을 합쳐 마초를 성에서 쫓아내었고 양씨를 포함한 마초의 모든 처 자식을 죽였다. 이에 격분한 마초는 원군을 얻어 공격해 왔고 왕이는 9가지 계책을 내어 30 일을 버텼다. 그 동안 이들을 도우러 온 원군이 도착하면서 마초는 포로였던 조월을 죽이고 퇴각하였다. 왕이는 당시 보기 힘든 여장부로서의 모습과 목적 달성을 위해 아들을 버린 비정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지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비정함을 비판하기도 한다.


- 신헌영(辛憲英) -


신헌영


신헌영은 신비의 딸이며 양탐의 아내이고  신창의 누나이면서 양수의 어머니이다. 헌영은 어려서 부터 두뇌가 명석 했으며 오래 전에 종회의 반란을 예상하기도 했다. 조비가 태자 책봉을 기뻐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자는 근심하고 두려워 해야 하는 자리라며 조씨의 위나라가 길지 않을 것임을 예견했다. 또한, 사마의가 정권을 빼앗으려고 할 때, 조상 측의 호출을 받게 된 동생 신창은

누나인 신헌영에게 이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신헌영은 사마의의 목적을 제대로 간파하여 신창을 조상에게 가게 했고 그 판단은 옳았다. 이후, 아들 양수가 종회의 참군이 되었을 때도 신월영은 양수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어 종회가 나중에 반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회의 참모였던 양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장제(張濟)의 부인 -


장제의 부인


장제는 동탁의 수하로 아내가 절세미인이었다. 동탁이 암살 당하고 몇 년 후 장제도 사망하여 장제의 조카인 장수가 장제의 처를 보살폈다. 이후,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을 하였으나 조조가 그의 숙모인 장제의 아내를 들이자 이에 장수는 조조의 행동에 크게 분노하였고, 조조는 이를 알고 장수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파악한 장수에게 기습을 당하게 되어 전위, 조앙, 조안민 등 많은 장수들이 죽었다. 연의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며 장제의 아내는 추씨라는 성으로 등장한다. 조조는 그녀를 불러서 자신을 접대 하게 하고, 조조와 추씨는 막사에서 며칠 간 나오지 않자, 이에 장수는 가후와 모의 하여 조조를 기습하여 조앙, 조안민, 전위 등 많은 장수들이 죽었다. 장제의 처는 이 후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 오국태(吳國太) a.k.a. 무열황후(武烈皇后) -


오국태


손견의 아내이자 손책과 손권의 어머니이다. 손견이 요절한 후, 자식을 엄하게 양육했으며 오나라 장수들의 유명한 요절 징크스로 인해 남편인 손견과 아들인 장남 손책을 비롯하여 장수한 손권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찍 죽으면서 다소 불행한 삶을 산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손권이 황제에 올라 무열황후로 추대 되었다. 그리고 정사에 등장하는 오국태는 한 명인데, 연의에서 오국태는 언니와 동생으로 나뉘어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언니 오국태는 손책과 손권을 낳았고, 손책이 우길을 처형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또한 죽기 전에 손권에게 동생을 부탁하면서 동생을 친어머니처럼 모시라고 당부하였고, 동생 오국태는 손부인의 어머니로 등장하면서 유비와의 결혼에 강력한 후원자가 되기도 한다.


- 경애황후(敬哀皇后) / 장황후(張皇后) -


경애왕후와 장황후


경애황후는 장비의 딸로 유비가 황제가 되자 태자인 유선과 혼인한 후, 궁에 들어갔다. 이후, 유비가 죽고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경애황후도 함께 황후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경애황후는 이른 나이에 죽게 되어, 뒤를 이어 동생인 장황후가 황후가 되었다. 경애황후는 촉의 멸망 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죽은 후에 경애황후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장황후는 촉이 멸망하여 시호를 받지 못하고, 성씨를 그대로 쓰면서 장황후가 되었다. 연의에서는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유선에게 제갈량이 장비의 딸이 어질다며 황후로 추천하였고 유선이 이를 받아들였다. 정사와는 달리, 장황후는 등장하지 않는다.


- 서씨(徐氏) -


서씨


서씨는 손견의 셋째 아들인 손익의 부인이다. 부하였던 규람과 대원은 손익에게 원한을 품어 측근인 변홍을 사주해 손익을 죽이려 하였고, 손익이 연회를 열 때 이를 거행하기로 했다. 손익의 부인 서씨는 점괘의 결과가 좋지 않아 연회 날짜를 바꾸라고 그에게 조언하였으나 손익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연회를 진행했고 결국, 측근이었던 변홍에게 칼을 맞아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씨는 범인들을 수배했고 규람과 대원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변홍을 죽이고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건의 범인을 알았으나 실권을 장악한 그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손권이 이 사건을 조사하려고 손하를 보내자 규람과 대원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손하를 죽인 후, 조조에게 투항하려 했고 특히, 규람은 과부가 된 서씨를 차지하려 했다. 이에 서씨는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 나서 상복을 벗은 후에 따르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규람은 서씨가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했다. 겨우 시간을 번 서씨는 손고와 부영을 불러서 그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며 사람을 모았다. 규람이 상복을 벗은 서씨를 차지하러 왔을 때 그곳에 숨어있던 손고와 부영은 규람을 죽였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 있던 대원을 죽였다. 이에 서씨는 다시 상복으로 갈아 입은 후, 남편의 영정에 규람과 대원의 목을 바쳤다. 후에 손권이 와서 이들의 잔당을 소탕한 후 서씨가 한 일을 듣고 그녀를 크게 칭찬하였다. 연의에서는 서씨의 미모가 출중하다고 나온다.


- 조절(曹節) a.k.a. 헌목황후(獻穆皇后) -


조절


조조의 딸로 헌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복황후가 처형되면서 황후가 되었다. 조비가 헌제에게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된 후 사람을 보내어 옥새를 받아오라고 하였는데, 조절은 몇 번이고 이를 거절하며 주지 않다가 결국, 옥새를 집어 던지면서 통곡하였고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라며 저주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이후, 헌제가 산양공으로 신분이 낮아지면서 조절도 산양공 부인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연의에서는 헌제에게 양위 할 것을 강요하자 조절이 이를 주도한 조홍과 조휴를 꾸짖으며 이를 지시한 조비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절은 죽은 후, 헌목황후로 추대되었다.


- 왕원희(王元姬) a.k.a. 문명황후(文明皇后) -


왕원희


사마소의 아내이며 사마염의 모친이기도 하다. 조부인 왕랑과 부친인 왕숙의 피를 이어 받아 어릴 때부터 경전을 외울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왕랑은 손녀를 아꼈고 여자임을 아쉬워 했다. 성품이 겸손하며 좋은 아내이자 며느리였다. 연의에서는 사마소의 아내 정도로만 언급된다. 나중에 아들인 사마염이 황제가 된 후에 왕원희는 문명왕후로 추대 되었다.


- 변씨(卞氏) a.k.a. 무선황후(武宣皇后) -


변씨


조조의 아내이자 조비, 조창, 조웅의 모친으로, 원래는 조조의 첩이었으나 이후 정실이 되었고 조비가 황제가 되면서 태황태후로 추대되었다. 연의에서는 조조의 정부인이 자식이 없어서 내쫓은 후, 변씨를 왕비로 삼았다고 나온다. 이후, 조비가 조웅을 자결하게 만들자 변씨는 조비가 조식을 죽이지 못하도록 조식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한다.


- 보연사(步練師 ) -


보연사


손권의 아내이자 손노반, 손노육의 모친이다. 원래는 손권의 후궁이었으나 총애를 받아, 황후는 아니었으나 사실상 황후대접을 받았다. 손권은 보연사를 계속 황후로 삼으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서부인을 황후로 삼길 원하면서 오나라의 황후자리는 계속 공석이었다. 보연사는 손권에게 다른 여자들을 계속 권하여 더욱 손권에게 많은 총애를 받기도 했다.




- 서부인(徐夫人) -


서부인


서부인은 손권의 아내이자 서곤의 딸로, 서곤은 손권의 여동생인 손여의 아들이다. 원래는 육상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으나 육상이 죽자 손권은 서부인을 비로 삼았다. 손권이 여동생의 손녀와 근친 혼을 한 것으로, 이후 신하들은 서부인을 황후로 삼으라 했으나 손권은 보부인을 황후로 삼고 싶어하여 서부인은 결국 황후가 되지 못하였다. 아들인 태자 손등을 그녀가 양육하게 했으나 보부인과 달리 투기가 심해 비에서 폐하였다.


- 손노반(孫魯班) -


손노반


손권과 보연사의 딸이자 손노육의 친언니이다. 손노반은 주유의 장남인 주순과 결혼하였으나 주순이 요절하고 난 후, 전종과 결혼하였다. 보부인이 죽자 손권은 손화를 태자로 삼고 손화의 모친인 왕부인을 황후로 삼으려 하였다. 손노반은 아버지 손권에게 왕부인을 모함하여 손권은 크게 노하였고, 이것을 들은 왕부인은 근심하다 죽었고 손화도 총애를 잃게 되었다. 또한, 손노반은 손권이 아들 손량을 총애하자 증손녀인 전혜해를 손량과 결혼 시켰으며, 손권은 7번째 아들인 손량을 태자로 삼았다. 손권이 죽고 손량이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오나라의 모든 실권은 손준이 잡고 있었다. 손준은 성품이 음란하여 궁녀들을 간음하고 그는 친척인 손노반과도 간통을 하기도 했다. 손노반은 손준에게 권하여 손화를 죽게 했고 손의가 손준을 암살 하려 다가 실패로 끝나자 미워하던 친동생, 손노육에게 누명을 씌워 암살을 공모했다고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손준이 죽자 손침이 권력을 장악했는데, 손노반은 손량 등과 함께 손침을 제거 하려 다가 계획이 실패하면서 예장군에 유폐되었다. 손노반은 전종과 재혼한 후 남편의 성을 따서 손노반 대신, 전(全)공주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연의에서는 전공주 대신 금공주로 나오는데 이는 전(全)자와 금(金)자의 한자가 비슷하여 연의 저자인 나관중이 실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의에서는 삼국지 후반부 내용이 축약되거나 삭제되는 경우가 많은데 손노반과 관련해서도 손화를 모함해 태자를 폐하는 내용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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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여자들 上 (초선, 손부인, 대교, 소교 등)

삼국지의 여자들 

(초선, 손부인, 대교, 소교 등)


- 초선(貂蟬) -


초선


삼국지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여성으로, 삼국지를 몰라도 초선은 아는 경우가 많다. 연의에서 왕윤의 수양 딸로 등장하는 인물로, 삼국지 최고 미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초선은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이지만 당시 최고 권력자인 동탁과 여포를 유혹하며 실존 인물인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에 포함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사 여포전에서는 여포가 무명의 동탁 시녀와 정을 통한 일이 짤막하게 서술 되어 있으며, 목표를 달성한 후에는 단순히 여포의 첩이 되어 활약상이 거의 없고 언급도 잘 되지 않는다. 서주에서 진궁의 계책을 따르려는 것을 말리며 여포가 결정적으로 망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 손부인(孫夫人) -


손부인


손견의 딸이자, 손책과 손권의 이복동생으로, 손권의 동맹 강화 정책으로 유비와 결혼했다. 당시에 나이도 많고 정략 결혼 상대인 유비와 손부인의 금슬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나중에는 서로 따로 거처 하여 별거 하면서 사실상 이혼 상태나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여러 정사의 기록들에서 이를 알 수 있고 단순히 양국 동맹 강화가 목적인 결혼이었다. 반대로 연의는 금슬이 좋은 것으로 나와 있고 정사와 연의 모두 터프한 느낌의 여성이다. 이름은 대개 손상향, 손인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손부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 대교(大橋) / 소교(小橋) -


대교소교


삼국지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미인 자매로서, 손책의 강동 평정 과정에서 환성을 점령한 후, 교국로라는 사람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 둘은 ‘강동이교’로 불리며 미색이 출중했다. 




이에 손책은 언니인 대교를 아내로 삼았고, 주유는 동생인 소교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손책과 주유는 삼국지 인물 중에서도 대표적인 요절 인물에 속하는 장수들이므로 대교와 소교는 둘 다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그 뒤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연의에서 제갈량은 조식의 ‘동작대부’라는 시를 조조가 강동이교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바꿔서 이를 소교의 남편인 주유에게 들려주었고 주유는 분노하여 조조와의 전쟁을 결정한다고 한다.  


- 서서(徐庶)의 어머니 -


서서의 어머니


서서는 연의에서 단시간에 눈부신 활약을 하여 그와 관련한 어머니에 대한 내용도 인상 깊다. 조조는 서서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 노모(老母)에게 편지를 써 서서를 부르라 했다. 노모가 유비의 인물 됨됨이를 조조에게 묻자, 조조는 유비가 소인배라며 평가절하 했는데, 그러나 서서의 노모는 이 말이 거짓임을 알고 조조를 꾸짖으며 조조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부하인 정욱은 모친의 필체를 흉내 내어 서서에게 거짓 편지를 보내서 그를 불렀다. 서서는 이 거짓 편지에 속아서 조조에게 왔고, 이에 실망한 서서의 노모는 서서를 꾸짖었으며 잠시 후, 목을 매어 자결하는 것으로 끝난다. 정사에서는 유비가 장판파에서 도망칠 때 조조군의 추격으로 서서의 모친이 사로잡히고 서서는 이를 구하기 위해 조조에게 투항한다.


- 황부인(黃夫人) -


황부인


황부인은 책략가 제갈량의 부인으로 유명하며 또한, 제갈첨의 모친이자 황승언의 딸이다. 황승언은 형주의 세력가였던 채모의 친척으로, 이 결혼으로 인해 제갈량은 형주의 명사가 되었다. 황부인은 정사와 연의의 평가가 비슷하다. 모두 못생긴 ‘추녀’로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또한, 당대 최고의 문관, 제갈량의 부인 답게 여러 방면에서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묘사된다. 노란 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이국적인 외모의 혼혈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원래는 절세 미녀였으나 얼굴에 진흙을 발라 평소에는 일부러 미모를 가리고 다녔던 탓에 그 미모를 제갈량만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황부인의 이름은 삼국지와 관련한 게임들과 민간 설화 등 전해지는 여러 이야기를 통해 황월영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 감부인(甘夫人) a.k.a. 소열황후(昭烈皇后) -


감부인


유비 아내 중의 한 명으로 유선의 어머니이며, 유선이 황제에 즉위 한 후 소열황후로 추대 된다. 정사에서는 유비의 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유선의 생모이나 그에 비해 기록이 거의 없다. 장판파에서 유비는 감부인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조운이 그녀를 구출하면서 살아남기도 했다. 연의에서 감부인은 정실처럼 그려지고 있으나, 정사와 마찬가지로 그 존재감이 크지 않다. 


- 미부인(麋夫人) -


미부인


유비의 수하, 미축의 여동생이자 미방의 누나로, 유비의 아내이나 정사에서 언급이 거의 없다. 또한, 미부인은 감부인보다 먼저 결혼했으나, 연의는 유선의 모친인 감부인을 우선시한다. 장판파에서 아두(유선의 아명)와 함께 있다가, 조운이 구하러 오자 아두를 조운에게 맡기고 부상 당한 자신이 조운에게 짐이 될 것을 염려해 근처 우물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연의의 이 장면은 짧고 강한 인상을 남겼으나 정사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가상의 내용이다. 또한, 나중에 감부인과 함께 황후로 추대 되나 정사에서는 감부인만 소열황후로 추대 되었다.


- 유안(劉安)의 아내 -


유안의 아내


연의에서 등장하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으로, 정사에는 없는 가상의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여포에게 패한 유비가 허도로 가던 도중에 유안이라는 사람의 집에 하루를 묵게 되었다. 유안은 유비에게 대접할 만한 음식이 없었고 결국, 아내를 죽여, 인육(人肉)을 대접했다. 유비는 유안에게 무슨 고기 인지를 물었으나, 유안은 늑대 고기라며 거짓으로 대답하였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잠자리에 든 후, 다음날 길을 떠나려고 할 때, 부엌에서 죽은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그 시체의 팔에 있는 살점들이 발라져 있었다. 이것은 삼국지연의 전체 내용을 통틀어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들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 견부인(甄夫人) a.k.a 문소황후(文昭皇后) -


견부인


견씨는 원소의 차남인 원희의 부인이었으나, 조조가 업성을 함락한 후, 뛰어난 미모로 인해 조조의 장남인 조비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를 보게 된 조조는 조비와 견씨를 혼인 시켰다. 조비가 견씨를 데려갔다는 말을 들은 조조가 이를 아쉬워하며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조비의 동생인 조식은 조비와 견씨가 결혼하자, 얼마 동안 식음을 전폐할 만큼 미모가 출중 했다. 이후, 견씨는 조비의 총애를 받으며 살았으나 나중에 모함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손자인 조예는 견씨를 문소황후로 추대하였다. 


- 축융부인(祝融夫人) -


축융부인


축융부인은 연의에만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로, 제갈량의 남만 정벌 때 맹획의 아내로 등장하여 비도의 달인으로 장억과 마충을 포로로 잡으며 무예가 출중한 여성으로 인상 깊게 등장한다. 그러나 계략에 걸려 포로가 되어 풀려나면서 이후, 활약상이 없이 맹획과 함께 언급된다. 나중에 칠종칠금으로 감동한 맹획이 항복할 때 그녀도 함께 항복하며 그 뒤로 등장하지 않는다. 


- 번씨(樊氏) -


번씨


계양의 태수였던 조범의 형수로 언급된다. 조범이 항복하고 조운이 계양태수로 임명되자 조범은 조운과 과부 번씨와의 혼인을 주선했는데 번씨는 조범의 형수로서 그 미모가 뛰어났었다. 조운은 성이 같다며 조범의 청을 거절했다. 주변 사람들도 번씨와의 혼인을 권하였으나 조운은 조범이 급히 항복하여 믿을 수 없으며, 그리고 천하에 여자는 많다며 계속 거절했다. 연의에서 번씨는 좀 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과부가 된 번씨는 재가의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녀의 조건은 전 남편과 같은 성인 조씨에 외모가 준수하고 문무를 겸비한 남자였다. 유비군에게 항복한 조범이 조운을 살펴 보니 조건에 부합하여 조운에게 번씨를 추천했다. 그러나 조운은 거절하며 조범을 비난했고, 앙심을 품은 조범은 조운을 죽이려 했으나 이를 알고 있던 조운에게 패배하여 항복했다. 후에 유비가 다시 주선했으나 조운은 거절했다. 주군의 여자 외에 여성과 무관하던 조운에게, 번씨는 그와 관련한 유일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 관우(關羽)의 딸 -


관우의 딸


정사에서 손권은 형주를 공격하기 전에 관우에게 사자를 보내어 제의를 하나 하는데, 그것은 손권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 시켜 촉과 오의 동맹을 맺자는 내용의 제의였다. 그러나 관우는 이러한 손권의 제의를 거부했고 이 소식을 듣게 된 손권은 크게 분노했다. 연의는 내용을 조금 더 추가하여 더 강조한다. “범의 새끼를 개의 새끼에게 내어줄 수 없다!” 정사와 연의 모두 관우의 딸이 등장하지만 이름을 알 수 없고,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름이 ‘관은병’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 두씨(杜氏) -


두씨


정사에서 두씨는 여포의 수하 진의록의 아내로 진의록이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게 되면서 전처인 두씨는 하비성에 남겨지게 되었다. 관우는 조조에게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며 조조를 여러 번 방문하며 다짐을 받아두었다. 조조는 청을 승낙했으나 이를 이상히 여겼고, 하비성을 함락한 후, 두씨에 대해 알아보니 두씨의 미모를 알게 되어 두씨를 첩으로 삼았다. 한편, 조조와 여러 번 약조를 했던 관우로서는 이것이 불만이었고 둘의 사이는 서먹해졌다. 정사에서 조조가 관우와의 약조를 깰 만큼 두씨의 미모는 출중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두부인은 조조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고 이후, 두씨는 패왕태비라는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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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정미칠적’은 1907년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에 찬성한 7명의 친일파 대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 시켜, 순종을 황제에 즉위 시킨 후 7월 24일, 대한제국 식민지화 조치의 일환으로 조약 안을 제시하여, 정미칠적이 서명하였다. 또한, 협약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기재한 각서도 체결하였으나 이는 공표되지는 않았다. 이후, 통감 권한의 확대로 행정권을 넘겨주었고 재판소와 감옥 설치로 탄압의 수위가 높아졌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 시키면서 군권 마저 일본에 빼앗기며 힘을 잃었다. 을사조약으로 힘을 잃은 대한제국이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체결되어 사실상 일본의 속국화 되었다.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영상으로 보실 분은

맨 아래 사진

유튜브 링크를 올려 두었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 -


이완용


을사조약 체결 찬성으로 을사오적에 포함된 그는 총리 대신으로 정미 7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이자, 1909년, 사법권을 박탈한 기유각서의 당사자, 1910년, 국권을 박탈한 경술국치의 당사자이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 포함된 인물로 지금도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원래, 백작이었으나 이후 승작하며 후작에 올라 정미칠적 중에 가장 높은 귀족 등급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족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일본에게 최고 등급 훈장인 ‘국화대수장’을 받기도 했다. 1909년, 이재명 의사에게 습격을 당했으나 최고 수준의 의료 수술을 받으면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폐에 입은 관통상으로 평생 시달렸고 결국, 1926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밖에도 친인척 중에 5명이 작위를 받는 등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친일 행위를 했다. 그는 친일 행각과 땅 투기로 재산을 더 불린 후, 부동산 대부분을 팔아 현금화 하여 유산으로 남겼고, 광복 이후에도 후손들이 땅을 거의 처분하면서 그의 재산을 추적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1992년에는 그의 후손이 시가 30억 원 상당의 북아현동에 위치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소송에 승소하면서, 친일파 승소 판례로 남아 한 때,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이 줄을 이으면서 ‘국유지가 아닌 경우’, 친일파 재산 반환 소송은 한 동안 친일파가 승소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당시, 승소한 이완용의 후손은 반환 받은 토지를 바로 매각한 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으며 이완용 보다 더 나쁜 놈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많다. 그는 갑신정변을 실패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조선 정부로부터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김옥균에게 설득 당하여 그와 동지가 되었다가 이후, 그가 암살 당하자 정부에 반감을 품었다. 창씨개명을 가장 먼저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노다 헤이지로’ 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하였다. 1904년, ‘유신회’를 조직, ‘일진회’로 개명하고 이를 통해 강제 병합 전까지 친일 행각을 했다. 일진회는 ‘국민신보’를 발간하여 일본을 옹호하며 국내 여론을 조작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친일을 계속하여 1920년 백작이 되었다. 이완용과 함께 고종의 퇴위를 적극 지휘하여 사죄하는 의미로 ‘자결하라’는 망언을 하였고, 1909년,일진회를 통해 한일 합방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여 순종에게 이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1911년, 한일 합병 1주년에 매일 신보 특집 호에 합병에 대한 기념 축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1925년, 69세의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백작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물려 받았다. 그의 아들인 송종헌도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세도가로 행세했고 손자인 송재구는 홋카이도 땅을 매입하기도 했다. 증손자는 ‘친일파 국가귀속 관련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을 내었으나 기각되었고 2007년, 국유지 사기 행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 군부대신 이병무 -


이병무


1894년, 보빙사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넘어간 후, 일본 교도단을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 무관 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일본과 교류하였고, 군사 분야 친일파로 활동했다. 한때, 친일로 구금 ,유배 등을 당하기도 했으나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복직, 승승장구했다. 1907년, 이완용의 내각에 군부 대신으로 입각하여 이완용이 주도한 고종의 퇴위에도 적극 참여하여 어전에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하며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아시냐’ 고 물으면서 양위를 거부하는 고종에게 강한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정미 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할 때 군부대신 자격으로 해산을 주도하고 협력했으며, 해산된 군대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진압을 지휘해 자신의 옛 부하들을 괴멸 시켰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체결에도 찬성하면서 그는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었다. 그는 일본에 협력한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이후, 일본군으로 활동하여 중장 계급까지 올랐다. 그는 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1926년, 63세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 작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증손자는 국회의원, 국무총리비서실장을 거쳐 환경부 차관, 친환경 경영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 탁지부대신 고영희 -


고영희


통역, 수행원, 주 일본 공사 등으로 일본을 방문하며, 결과적으로 일본 통으로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 탁지부 대신으로 입각, 고종 황제의 퇴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탁지부 대신으로서 시정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총감과 ‘일시대부금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고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죽임을 당하자 장충단에서 관민 추도회를 열어 그를 추모하였으며 정미 7조약 찬성으로 정미칠적에 이름을 올린 후, 한일 병합 찬성으로 경술국적에도 포함되었다. 1910년, 합일 강제 병합 후 자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 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911년, 한일 병합 1주년 기념 매일 신보 특집호에 한일 합병을 찬양하는 축사를 기고하기도 했으며 메이지 천황 추도식에 조선 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1916년, 68세에 사망, 장남이 작위를 계승했다. 장남인 고희경도 나중에 중추원 고문을 지내면서 부자가 중추원 고문을 지낸 가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고희경은 부친 고영희의 작위를 뛰어 넘어 1920년, 백작으로 승작이 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친일파들의 재산이 국가로 환수 되면서 그 후손들이 반발하며 많은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2009년, 고희경 후손들은 물려 받은 땅을 판 돈을 반납하여 자진 환수의 첫 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영희의 손자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자, 고영희의 후손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하며 작위를 승계했을 뿐이고, 불합리 하다고 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1,2심에서 패소 했다. 


- 법부대신 조중응 -


조중응


조중응은 일찍부터 북쪽은 막고 남쪽을 열자는 ‘북방남개론’을 주장, 일본 친화적 성향 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도 가담하였고, 명성황후의 폐비 조칙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붕괴하게 되자 일본으로 가서 10 여년 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과 결혼했는데, 이미 아내가 있었던 그는 나중에, 고종의 중재로 둘 다 정실로 삼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귀국하여 이완용 내각에 법부 대신으로 입각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에 협력하였고 이토 히로부미 총독이 죽기 몇 달 전, 그의 앞에서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낭독하기도 하였고, 그가 죽자 장례식에 내각 대표로 참석했다. 1910년, 한일 병합에도 찬성, 경술국적이 되었고 일본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자작 작위를 주었다. 그는 데라우치 총독과 이완용과의 3자 회담에서 한일 병합 조약 초안에 대해 협의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식 유교를 일본식 유교로 바꾸기 위해 경학원을 설립하는데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9년, 60세 사망, 장남이 작위를 계승했다. 나중에, 조중응의 후손들도 국가에 환수된 땅을 돌려 달라고 소송 했다가 결국 패소 하였는데, 이는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 환수에 불복하여 국가에 소송을 낸 것의 첫 판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응의 후손들 중에 대부분이 보유한 재산을 처분하여 제 3자에게 매각한 후, 이미 일본에 귀화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 학부대신 이재곤 -


이재곤


그는 왕실의 근친으로 고종과 가깝게 지냈다.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 대한제국의 국호와 연호의 개정을 주장하면서 고종의 환심을 샀고, 이후 요직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1906년, 황실의 재산 정리를 주도하였고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도 참여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며 지탄을 받았고, 정미 7조약 체결 찬성으로 정미칠적이 되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한자 통일회 이등박문 추도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여러 친일 단체의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1910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주로 불교계와 왕실을 중심으로 친일 행각을 하며, 관련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한일 합병 1주년을 기념하는 매일신보 특집호에 한일 합병을 기념하는 축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3.1운동 후, 그는 귀족 작위를 반납하려 했으나 일본 정부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3년, 85세 사망, 작위는 장손이 계승했다. 그와는 달리 넷째, 다섯째 아들은 독립 운동가로, 째인 이관용은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다섯 째인 이순용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이재곤의 후손도 친일파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자 이에 소송을 냈으나, 2009년 패소하기도 했다.


- 내부대신 임선준 -


임선준


1907년, 이완용 친일 내각에서 내부 대신을 맡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에 협력하였다. 특히, 이완용의 며느리가 임선준의 조카 딸로서, 임선준과 이완용, 두 친일파는 사돈지간이다. 한국을 시찰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한 친일파들과 함께 ‘신사회’를 조직하였으며 1908년, 탁지부 대신이 되자 재무를 총괄하여 직책을 친일 행각을 하는데 적극 사용하였다. 의병의 목표가 되어 처단 당한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도 하였고 재직 당시, 지방에 위치한 일본 소유로 된, 군용지, 철도 용지에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여러 친일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등 일본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는 등, 꾸준히 친일 행각을 벌이면서 지탄을 받았고 1919년, 60세에 사망, 아들이 작위를 계승했고 손자까지 습작 하여 3 대가 친일 명단에 올랐다. 2007년, 친일파 재산 국가 귀속 2차 결정에서 일부 재산(189㎡)이 귀속 결정이 되기도 했다.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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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게 죽은 비극의 왕비들, 혹은 여성 권력자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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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여성 권력자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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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부인 강씨


궁예부인 강씨


궁예라고 하면 ‘관심법’으로 유명한데, 그의 아내는 강씨 성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 고작 몇 줄 뿐이지만, 관심법을 사용한다는 남자와 결혼 했으니,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것이다. 특히나 여성은 이름도 기록하지 않던 시대였고, 궁예도 점점 폭군이 되어가고 있던 시기였으니, 그녀 역시, ‘관심법’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날로 미쳐가는 궁예에게, 강비가 “옳지 않은 일을 많이 한다.”고 충언을 올렸는데(ㄷㄷㄷ), 이 말이 궁예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 궁예는 이에 바로 ‘관심법’을 사용하였고, 강비의 심연을 꿰뚫어 보며 말하기를,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니 어찌 된 일이냐” 그리고 나서 강씨에게 간통죄를 씌웠고 강씨의 두 아들까지 “내 아들이 아니다.” 라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강씨는 물론,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치는 모습을 보였다. 궁예가 강비를 죽인 장면은 정말 참혹했는데, “다른 남자와 간통하여 더러운 씨를 남겼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에게 끔찍한 형벌을 내렸다. 무쇠 방망이를 불에 달구어, 음부를 쳐서 죽였다. 강씨는 이토록 끔찍한 형벌을 받았지만 정작, 불륜에 대한 증거는 ‘관심법’ 뿐이었다.


제인 그레이 (Lady Jane Grey)


제인 그레이


즉위기간이 9일로, ‘9일 여왕’ 으로 알려져 있는 제인 그레이는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부모에 의해 정략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후 주변의 신교도들에 의해 여왕이 되었는데, 메리 1세 (피의 메리:Blood Mary)가 재 집권하면서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게 되니 그녀의 부모는 그런 제인을 버려 두고 도망쳤다. 그래서 ‘블러디 메리’ 라는 잔혹한 별명을 가진 잔인하기로 소문난 메리 1세 조차도, 처음에는 제인을 동정하여 살려주려 했다. 그리고, 메리 1세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면 제인 그레이를 풀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후, 제인의 아버지가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며 여론은 제인을 죽여야 된다고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인을 살려주고 싶었던 메리는, 신교도였던 제인 그레이를 구명하기 위해 ‘구교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 는 제안을 했으나 원래, 제인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처형 당할 당시 제인 그레이의 나이는 16세, 그녀는 어린 나이에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사형 집행인들 조차도 그런 그녀를 동정했다. 그녀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캐서린 하워드 (Kathryn Howard)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하워드는 헨리 8세의 5번째 왕비이다. 원래는 전 왕비 클레페 앤의 시녀였는데, 어린 캐서린의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성격이, 헨리 8세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된 것이다. 이에, 헨리 8세는 ‘가시 없는 장미’ 라고 부르며  캐서린을 상당히 총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비가 되기 전 사실 혼 관계에 있던 일과, 헨리 8세의 젊은 시종과의 불륜이 탄로나면서, 헨리 8세는 크게 충격을 받아 분노하였고, 관련된 남자들을 피부를 벗겨 잔혹하게 죽였다. 




헨리 8세는 아래와 같은 법 조항까지 만들었다. ‘왕비가 될 여자가 과거를 숨기는 것은 반역죄’ 죽기 직전에 제인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혼만 6번 한 나이 많은 권력자 헨리 8 세와, 철없는 어린 왕비의 조합이 부조리해 보이고 오히려 캐서린을 동정하게 되는 것은, 단지 시대가 다르기 때문일까?


엘레나 차우셰스쿠 (Elena Ceauşescu)


엘레나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의 부인으로, 대통령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분노한 국민들이 루마니아 혁명을 일으켜, 니콜라에의 정권이 급작스럽게 붕괴하게 되자, 그들 부부는 외국으로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결국 붙잡히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체포된 후에도 군인들이 먹는 음식을 주자,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음식’ 이라며 거부했고, 개인 욕조를 가져다 줄 것을 요구하는 등끊임 없이 불만과 요구 사항을 늘어 놓았다. 갇혀 있는 와중에도 부부의 사이는 좋아서 이들 부부는 잠잘 때 부둥켜 안고 잤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부부의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에 그들의 변호사도 변호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녀의 죄목은 6만 명 이상의 참혹한 대 학살, 경제 파괴, 공공 재산 착취, 도주 기도 등이었다. 사형 당일,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녀는 ‘나는 어머니로서 너희들을 대해왔다.’ 하고, ‘자신의 몸에 손대지 말라’ 호통치는 등, 계속해서 현실 감각 없는 말을 하였고, 사형 집행 시, 군인들이 너도 나도 총을 쏘겠다고 지원하는 바람에, 약 160 발의 실탄을 준비했다고 한다. 원래 한 명 사형 시키는데 5 발의 총알만 사용하고,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공포탄이 섞여 있는데, 160 발의 총알을 모두 실탄으로 준비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당시 국민들의 분노를 보여준다.


아달랴 (Athaliah)


아달랴


배경은 당시에 이스라엘은 분단 되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어 있었다. 북 이스라엘의 공주였던 아달랴는, 남 유다 왕과 정략 결혼을 했다. 이후, 그녀의 아들이 남 유다 왕이 되었을 때, 북 이스라엘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왕과 왕비였던, 그녀의 부모들이 살해 당하고, 이에 조문을 갔던 아들들도 모두 살해 당하면서, 아달랴는 이에 위기감을 느껴 측근을 동원하여 남 유다의 모든 왕족들을 몰살 하였고, 스스로 남 유다의 7대 왕에 올랐다. 그녀는 남 유다 북 이스라엘을 통틀어 유일한 여왕이었다. 이후, 아달랴는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여,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사람을 제거했다. 하지만 죽은 전 왕(아달랴의 아들)의 누나가 어린 요아스 왕자(아달랴의 손자)를 숨겨주었고, 어린 왕자는 할머니 아달랴의 눈을 피해 6년 간 성전에 몰래 숨어 지내다가 7살이 되자 그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요하스 왕자를 왕으로 선포하였다. 아달랴가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반란에 대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모반이다! 모반이다!” 라고 외쳤으나, 주변의 아무도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이후,사람들이 그녀를 처형했을 때에도 모든 국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고 한다.


*몇몇 사진들은 역사적 인물과 관계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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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게죽은왕비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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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게 죽은 비극의 왕비들, 혹은 여성 권력자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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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불린 (Anne Boleyn)


앤 불린 이미지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2번째 왕비로, 헨리 8세는 앤과 결혼하기 위해 첫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나라의 종교까지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녀에게 간통, 근친상간, 마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를 씌워 참수형을 내리는데, 검을 잘 쓰는 사람을 고용하고, 날카로운 칼을 준비하여, 최대한 고통 없이 죽였다... 고는 하지만, 사실 앤 불린의 죄목들은 증거가 부족하였고, 정황상 아무리 봐도, 이는 단순히 헨리8세의 변심과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한 결과로 보인다. (개인적 생각) 또한 앤 불린은 초반에 왕의 제안(?)을 거부하며 왕을 더욱 안달 나게 만드는 팜므파탈로 알려져 있지만, 개인 적으로는, 그녀는 그저 헨리 8세의 욕심과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쓰고 버려진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왕을 원망하지 않았고 축복하며 죽어갔던 것은, 여전히 헨리 8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딸을 지키기 위함 이었을까?


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


메리 스튜어트 이미지


프랑스의 세자빈이었던 메리는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자 마자 죽는 바람에, 고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같은 할머니를 둔 사촌 헨리 스튜어트 단리경과 결혼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메리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잉글랜드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위에 나온 헨리8세가 아들이 없어서 여왕이 됨) 그녀와 정적 관계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인 단리 경이 목 졸려 살해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배후에는 보스웰 백작 제임스 햅번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그 후 그는 메리를 납치하여 강간 했다. 여러가지 압박을 받아오던 메리는 자신을 납치, 강간 했던 보스웰 백작과 결혼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 남편인 단리경을, 보스웰 백작과 공모하여 살해했다는 의심까지 받게 되며, 메리의 평판과 인기는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적법한 왕위 계승권자였고, 주변에는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그녀는 여러 번의 반란을 일으키면서, 셰필드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정적인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죽일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메리가 모반을 꾸몄다는 한 통의 편지가 발견 되면서 모반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 했으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죽기 전에 그녀는 조건을 걸었는데, 째, 자신을  프랑스에 묻어줄 것둘째는 자신의 시종들에게 연금을 줄 것마지막은 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할 것이었다. 또한 그녀의 목을 치는 데 3번 걸렸다고 하는데, 처음은 잘못 맞아 뒤통수에 박혔고, 다음은 목에 약간의 힘줄만 빼놓고 거의 절단, 마지막으로 한번 더 목을 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인 마누스 투아스 도미네 콘피데 스피리툼 메움 (In manus tuas Domine confide spiritum meum) “주여 당신께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명성황후


명성황후


나는 조선의 국모다“는 드라마와 뮤지컬에 등장해  한국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줬던 대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녀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고,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군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그녀의 행적과는 별개로 한국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의 비참함은 여러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에조 보고서, 매천야록, 우범선 최후사 등이 있다. 영국 데일리 메일의 기자이자, 조선주재 특파원인 프레드릭 매킨지(Frederick Mckenzie)에 의하면,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방 한 구석에 숨은 여인을 발견하고, 머리채를 붙잡고 황후가 아니냐 물었다. 왕비가 이를 부인하며 마루 밑으로 도망 치려는 순간 일격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왕비가 정체가 탄로 나자 살려 달라고 애걸 했으나 일본인들이 칼로 내려쳤다는 기록도 있다. 숨어있던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히고,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하였다.

 

 
이는 궁녀들과 비교하여 임신 흔적을 조사하여, 왕비인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함 이였다고 한다. 위의 일화는 에조 보고서의 항목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꽤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비의 신원 확인 방법에 대해서는 기록들의 설명이 제각각 엇갈려, 여러 설이 있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직접 왕비의 시체를 확인한 후 증거인멸을 위해 이를 불태워 없애라고 명령했고,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에서 시체를 불태웠다.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


마리 앙투와네트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그 당시 비참한 삶을 살던 프랑스 국민들은 결국 혁명을 일으켰고, 왕비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녀에게는 재정 낭비, 부정부패, 오스트리아와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 시킨 혐의, 백성을 기만한 혐의, 프랑스를 멸망 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 등, 여러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그 어느 것도 그녀를 사형 시키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세뇌 당한 어린 루이 17세가 어머니에게 겁탈 당했다”는 증언을 하고 말았고, 결국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참수형 당일 그녀는 특별 죄수로서, 거름 통을 싣는 짐 수레에 실려 사형장으로 끌려갔으며, 머리는 짧게 깎여져 있었고, 두 손은 묶여 있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일화로 그녀가 단두대 앞에 설 때 실수로 사형 집행인의 발을 밟았는데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근친상간으로 처형 당하기 전 유언장에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 라고 적은 것을 보아 그녀는 정치와 거리가 먼 순수한 사람이며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처지를 살펴보면 무지가 곧 죄이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세벨 (Jezebel)


이세벨 이미지


이세벨은 기원전(BC)의 인물로, 이스라엘의 7대왕인 아합의 왕비이다. 그녀는 페니키아 왕 엣바알의 딸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며, 바알을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믿는 신 야훼를 미워하여,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거의 모두 다 죽였다. 성서에도 유일하게 살아 남았던 예언자 엘리야와 이세벨이 대결하는 장면이 곳곳에 나올 만큼, 그녀의 야훼에 대한 증오심이 컸고, 이스라엘 국민들 역시 바알을 숭배 하도록 만들었다. 아무래도 기원 전 종교였으므로, 문란하고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던 바알 숭배는 야훼 신앙이 자리 잡고 있던 이스라엘을 빠르게 타락 시켰고, 이스라엘의 국권 역시 쇠약해져 갔다. 한편 그녀는 그 당시의 여걸 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예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도망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들인 요람왕이 죽었음에도 슬픈 기색이 없이, 예후가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도, 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질할 만큼 담대 했다. 예후가 성에 도착하자, “주인을 죽인 시므리여, 평안하냐?” 라며 예후를 비꼬아 말했는데, 이때 시므리는  군대 장관으로 엘라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7일 만에 오므리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이었다. 즉 예후를 반역자라고 부른 것이다.(이름 어렵네ㅠ) 그러나 예후가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라고 묻자, 내시 두 명이 그녀를 창문 밖으로 던졌다. 후에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체를 찾았는데, 그녀의 시체를 개들이 다 뜯어먹은 뒤였고, 남은 것은 두골과, 발과 손바닥 밖에 없었다. 한편 이 전에 예언자 엘리야는 이세벨의 죽음을 예언 했는데, 그 내용은 “개들이 성읍 곁에서 이세벨의 시체를 먹으리라”라는 것으로 결국 이루어졌다.


잔인하게 죽은 왕비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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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여왕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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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 역사 이야기 - 소풍같은전쟁, 미서전쟁, 뉴프런티어, 신미양요, 유진, 갑오개혁

미스터 션샤인 역사 이야기

소풍같은전쟁, 미서전쟁, 뉴프런티어, 신미양요, 유진, 갑오개혁


안녕하세요, 꼬꼬입니다^^

오늘은 미스터션샤인의 대사에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미양요 이미지


미스터 션샤인, 요즘 정말 국민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죠?

또한 내용과 시대 배경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말

민감한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것 같아요.


역사책 이미지


오늘은 그 중에서도 1화에 등장한

소풍같은 전쟁, 미서전쟁, 제너럴셔먼호 사건, 엘카네이 전투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갑오개혁

그리고 극중 남자 주인공 이병헌이 연기하고 있는

'유진'이라는 이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해요.


2018/11/07 -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 [미스터 션샤인 역사 배경] 뉴 프런티어 (New Frontier), 유진(Eugene)


(서양에도 유진이라는 이름이 있답니다.)


유진 이미지


미스터 션샤인 역사 왜곡 구설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장면들도 있죠)




개인적 생각으로는 역사적 고증이

철저하게 잘 된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김은숙 작가님 정말 대단하네요~


여장군 이미지


미서 전쟁은 스페인과 미국이 벌인 전투에요.

익숙한 단어는 아니지만

당대 강대국이던 스페인을

미국이 이김으로써

오늘날의 경찰 국가로서의 미국이 성립될 수 있었죠.


미국 이미지


세계사와 한국사를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본다면

드라마의 재미가 배가 되겠죠?

덤으로 깨알지식도 늘어나구요~


다리 이미지


동영상 즐겁게 보시고

구독과 좋아요, 꾸욱~ 눌러주세요^^+++



미스터 션샤인 역사적 배경

유튜브 영상 보러 가기 클릭

 ↓

미스터션샤인의역사적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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