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갑자 역사] 연도별 한국사 주요 사건
우리나라의 주요 역사적 사건에는 육십갑자가 붙은 이름이 많다. 그런 사건을 순서대로 연도별로 모아보았다.
무인정사(1398년, 태조 7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태조 이성계가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자 정도전 등은 이를 지지하고, 전비 한씨의 소생인 방원 등이 이에 분개하면서 이복 형제간에 일어난 싸움이다. 이방원은 휘하 부하들과 사병들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살해한 후, 이복 형제인 방석과 방번까지 죽이고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기해동정(1419년, 세종 1년)
이종무 등이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한 일
대마도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생활이 궁핍해지자 대마도의 왜적들은 명나라 해안으로 약탈하러 가는 도중에 조선의 해안지역을 약탈했다. 조선에서는 이를 새로운 대마도 도주의 선동이라고 간주하고,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삼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기해왜역' 또는 '대마도 정벌'이라고도 한다.
계해약조(1443년, 세종 25년)
왜인들의 조선 왕래를 통제하기 위해 쓰시마 섬 도주와 맺은 조약
쓰시마섬을 정벌한 후, 조선과 일본과의 왕래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이에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된 쓰시마 도주는 조선에 여러 차례 통교를 요청했다. 그러자 조선은 삼포를 개항하고 이전에 비해 제한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했다.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왕권 탈취를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인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 그리고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들을 소집하여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등의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낸 후, 나중에 사약을 내려 죽였다. '계유사화'라고도 한다.
병자사화(1456년, 세조 2년)
사육신 등이 단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세조를 축출하려 한 사건
단종을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의 계획이 동지였던 김질의 배반으로 탄로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세조는 이들을 직접 심문했고, 이 일과 관련된 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경진북정(1460년, 세조 6년)
신숙주 등이 두만강 일대에 사는 모련위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여진족의 한 부족인 울량합의 추장 아비차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조선을 침입하자, 조선은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로 임명하여 8천의 군사로 여진족을 정벌하게 했다. 2차에 걸친 정벌에서 조선은 대대적인 전과를 올리며 울량합족을 복종시켰다. 이후, 신숙주의 건의에 따라 무산지방을 조선의 영토로 포함시켜 이주민을 정착시킬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의 사관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리자 훈구파 이극돈은 이를 연산군에게 고했다. 조의제문은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대어 지은 글로서, 훈구파는 사림을 제거할 목적으로 연산군에게 알렸다. 그러자 평소에 사림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사형시키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등 사림파 선비들을 탄압했다.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관련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윤씨가 폐위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일을 알게 된 후, 이 일에 관계한 사람은 물론 이를 방관한 사람까지 모조리 찾아내 죄를 물었다. 또한 윤씨의 복위에 반대한 사람들도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화를 입게 되었다.
경오왜변(1510년, 중종 5년)
삼포에 거류하던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
조선 건국 후, 왜인들과 무역거래가 늘어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에서만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했다. 그러자 왜인들의 활동이 엄격히 통제 되면서 왜인들의 불만이 커져 갔다. 이에 쓰시마 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들이 제포와 부산포를 함락하고 염포에 침입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으나 난동은 금방 제압되었다. 이후 조선은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들과의 통교를 중단했다. '삼포왜란'이라고도 한다.
임신약조(1512년, 중종 7년)
임신년에 조선과 쓰시마 도주 사이에 맺은 약조
삼포왜란 이후, 삼포가 폐쇄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된 쓰시마 도주는 조선과의 재통교를 요구했다. 이에 이전에 맺었던 '계해약조'보다 제약이 한층 더 강화된 조건으로 약조를 체결했다.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훈구파가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숙청한 사건
조광조 등 사림파들은 중종의 든든한 지지를 업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혁신정치를 폈다. 그러나 결국 중종마저도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신진사류들에게 부담과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신진사류의 세력확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가 희빈 홍씨와 짜고 '주초위왕(走肖爲王)', '주(走)'와 '초(肖)'를 합쳐서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음모를 꾸몄다. 결국 조광조에게 사형이 내려지는 등 수많은 사림파들은 숙청당하거나 유배당하면서 사림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신사무옥(1521년, 중종 16년)
안처겸의 모친상 때 조문록을 역모 가담자 명단이라고 무고한 사건
송사련, 정산 등은 안당의 아들 안처겸의 모친상 때 방문한 인사들의 방명록 명단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변했다. 이에 안당의 일가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후 선조가 즉위한 후 안당의 후손이 억울함을 상소하면서 이 일은 허위 사실로 밝혀졌고 처형을 당한 사람들은 누명을 벗었다.
을사사화(1545년, 명종 원년)
윤원형의 소윤파가 윤임의 대윤파를 제거한 사건
소윤파인 윤원형과 대윤파인 윤임은 모두 같은 파평 윤씨였으나 각각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를 내세우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심한 대립을 했다. 처음에는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윤임이 힘을 얻었으나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소윤파인 윤원형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자 윤원형은 윤임과 그를 따르는 세력을 모두 유배시켰고, 몇 년간 대윤파들을 숙청하며 탄압했다.
정미약조(1547년, 명종 2년)
사량진왜변으로 단절된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1544년, 일본 전국시대의 내란을 틈타 왜인들이 사량진에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하며 사량진왜변을 일으켰다. 이에 조선은 '임신약조'를 무효로 하고 일본의 내왕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 측은 이를 사죄하며 국교 재개를 요청했고, 조선에서는 다시 일본인들의 내왕과 통교를 허용했다.
정미사화(1547년, 명종 2년)
윤원형의 소윤파가 대윤파의 잔존 세력을 숙청한 사건
1947년 9월, 선전관 이로와 부제학 정언각은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여왕이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라는 내용의 익명의 벽서를 발견했다. 이에 윤원형 등은 이것을 대윤파의 잔당들 탓으로 돌렸고, '을사사화' 때 화를 피했던 대윤파의 잔존 세력들과 사림 세력들이 대거 숙청당하기에 이르렀다.
을묘왜변(1555년, 명종 10년)
왜구가 조선정부의 통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전라도 일대를 침입한 사건
조선은 삼포왜란 이후 임신약조, 정미약조 등을 맺으며 왜구에 대한 무역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침입했다. 그러자 조선은 호조판서 이준경 등을 보내 왜구를 토벌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비변사의 권한을 확대하여 남해안과 제주 지역을 담당하게 했다. '을묘왜란'이라고도 한다.
계미삼찬(1583년, 선조 16년)
동인 중진인 송응개, 박근원,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려다 유배된 사건
이이는 붕당이 일어나고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심화되자 이를 중간에서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조치에 동인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연일 이이를 비판하며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동인의 중진인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귀양보내는 조치를 내렸다. 이후 이이는 서인을 대부분 등용했고,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기축옥사(1589년, 선조 22년)
정여립의 모반 혐의로 동인이 박해를 받은 사건
한준, 이축, 박충간 등은 동인의 중심인물인 정여립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월 활쏘기를 익히며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은 이 일로 3년간 박해를 받으면서 천 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1592년에서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 초반, 관군이 계속 일본군에게 패하면서 왕이 한양을 떠나 피난을 가는 등 한때 나라 전체가 큰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이 이어지며 일본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내면서 일본측에서 협상을 요청했다. 이후 협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97년에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했으나 1598년에 히데요시의 죽음을 구실로 모두 철수했다. 7년에 걸린 전쟁으로 온나라가 폐허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년)
임진왜란 휴전 교섭이 결렬된 후, 일어난 왜군의 재침략
임진왜란 화의가 진행되면서 침략해 온 왜군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왜장 가토 기요마사 등은14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차 침입했다. 그러나 이순신 등이 활약하며 왜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모두 철수했다.
기유약조(1609년, 광해군 1년)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일본과의 통교를 위해 맺은 강화조약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통교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이에 조선은 국서의 정식요구, 범죄인의 압송, 피로인 송환 등 3대 조건을 제시했고 일본이 여기에 응하면서 조약이 성립되었다. 쓰시마섬의 세견선을 20척으로 규정하고 사신의 접대나 벌칙을 정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계축옥사(1613년, 광해군 5년)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
광해군이 즉위한 후, 집권한 대북파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우두머리인 영의정 유영경을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이후에도 대북파는 자신들에게 계속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소북파들을 축출하고자 했다. 때마침 여러 서얼들이 신분차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은상인을 죽인 후, 은 수백 냥을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북파는 그들을 문초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내며 영창대군을 귀양보내고 반대파를 쫓아내며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계축화옥', '계축사화'라고도 한다.
계해반정(1623년, 광해군 15년)
서인이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린 사건
대북파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 했다. 또한 밖으로는 실리를 추구하는 중립외교를 지향하며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의 반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나고 능양군(인조)이 추대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인조반정'이라고도 한다.
정묘호란(1627년, 인조 5년)
조선과 후금 사이에 일어난 전쟁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며 후금을 자극했다. 그러자 후금은 광해군 폐위 문제를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후 양국은 정묘약조를 통해 강화를 맺고 형제의 나라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정묘노란'이라고도 한다.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청나라(후금)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나, 청나라는 더 나아가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에 강경한 자세를 취하자 청나라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했다. 이후 조선은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가는 등 형세가 불리해지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이로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의 군신관계를 맺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기해예송(1659년, 현종 원년)
효종의 사망 후,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두고 일어난 논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입을 상복에 관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은 효종은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고 주장하며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왕위에 올랐으면 첫째 아들로 인정된 것이므로 3년간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갑인예송(1674년, 현종 15년)
인선왕후의 사망 후,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두고 일어난 논쟁
인선왕후 장씨는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이다. 그가 죽자 자의대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붙었다. 당시 집권층인 서인은 기해예송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여겨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여겨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기해년에 일어난 예송까지 문제 삼으며 남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서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 결과 서인들이 실각하고 남인들이 실권을 차지했다.
경신환국(1680년, 숙종 6년)
서인이 남인을 대거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사건
남인의 우두머리였던 영의정 허적의 집에 조부인 허잠이 시호를 받은 것에 대한 잔치가 있었는데 그날 비가 오자 숙종은 임금이 쓰는 천막을 보내 주려 했다. 그러나 이미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는 것을 알자 숙종은 크게 노했다. 이에 숙종은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요직을 서인으로 바꾸는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이후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복선군, 복창군, 복평군 형제와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하면서 관련한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되었다. 이로서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경신사화', '경신출척', '경신대출척', '경신정변'이라고도 한다.
기사환국(1689년, 숙종 15년)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집권한 일
숙종은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궁녀 장옥정(장희빈)을 후궁으로 삼고, 이후 그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를 서인은 반대하고 남인이 찬성하면서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사약을 받아 죽는 등 탄압을 받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갑술환국(1694년, 숙종 20년)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에 관한 문제로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일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한 숙종은 갈수록 장씨의 방자한 행동에 환멸을 느겼다. 한편, 남인은 당시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던 주동자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 복위를 지지하면서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등용했다. 이에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되고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게되었다. 이후 남인은 급격히 쇠퇴하여 다시는 집권하지 못했다. '갑술옥사' 또는 '갑술경화'라고도 한다.
기묘과옥(1699년, 숙종 25년)
과거 시험의 부정으로 일어난 대규모 옥사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기 위해 임시로 시행된 시험에서 34명이 합격했다. 그러나 시험지 바꿔치기 등의 부정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시험 자체가 무효가 되었다. 시험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병역 복무, 유배형 등에 처해졌다.
임인옥(1722년, 경종 2년)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해 소론이 노론을 숙청하고 실권을 잡은 사건
장희빈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연잉군(훗날의 영조)를 세제로 책봉하여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했다. 그러나 소론은 이를 노론의 불충으로 몰아갔고, 노론이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고 무고했다. 그 결과, 노론의 4대신을 포함한 수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신축년(1721년)에 시작하여 임인년(1722년)에 끝났다고 해서 '신임사화', 또는 '신임옥사'라고도 한다.
정미환국(1727년, 영조 3년)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정부의 인사를 개편한 일
영조는 극심한 당쟁을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당파성이 강한 사람은 제거하고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하려 했다. 그러나 갈수록 노론이 중요 직책을 차지하게 되면서 노론은 소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고, '임인옥'에 대한 보복을 계속 고집했다. 이에 영조는 여러 노론들을 삭탈관직시키고 소론을 대거 기용했다. 이로서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을해옥사(1755년, 영조 31년)
윤지가 나주 객사에 붙인 벽서와 관련해 일어난 역모 사건
'신임사화'에 관여한 죄로 오랜 귀양살이를 했던 윤지는 노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은밀히 세력을 규합했다. 그리고 나주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여서 민심을 동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면서 윤지가 처형당하는 등 많은 소론파 인물들이 숙청당했고, 소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나주괘서사건' 또는 '나주괘서의 변'이라고 하기도 한다.
임오옥(1762년, 영조 38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
사도세자는 15세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조와 여러 갈등을 겪었다.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은 세자에게 약을 올릴 것을 권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영조 몰래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내관과 궁녀 여럿을 죽이는 등 비행을 저질렀다. 이런 일들이 쌓이자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임오화변', '사도세자사건'이라고도 한다.
신해박해(1791년, 정조 15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천주교도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모친상 때 신주를 모시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모친상을 지냈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남인은 이 문제로 천주교를 옹호하는 신서파와 천주교를 탄압하는 공서파로 나뉘어 대립했고, 이 문제는 정치적인 사안로 확대되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되면서 더 이상 그 사건은 확대되지는 않았으나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신서파와 공서파의 대립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신해사옥', '신해교난', '진산사건'이라고도 한다.
신유박해(1801년, 순조 원년)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
18세기 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확산되고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등장하자 지배층은 큰 위협을 느꼈다. 이후,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박해령을 선포하고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훈, 정약종,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 100여 명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를 당했다. '신유교난', '신유사옥'이라고도 한다.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
기해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신유박해' 이후, 정권을 잡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약화되었다. 그러자 프랑스에서는 모방, 샤스탕, 앵베르 등 선교사 3명을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했다. 갈수록 천주교의 교세가 강해지자 조정에서는 박해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고, 이에 풍양 조씨가 중심이 되어 천주교를 탄압하며 70여 명의 카톨릭 교도를 처형했다. 이후 헌종은 척사윤음을 내리고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천주교를 탄압했다. '기해사옥', 또는 '기해교난'이라고도 한다.
경신박해(1859년, 철종 10년)
임태영이 약 9개월간 자행한 천주교도 탄압 사건
기해박해 때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의 아들 좌포도장 임태영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약탈과 방화 등의 불미스러운 일들로 동정 여론이 일어나 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집안의 김병기 등이 잘못을 지적하고 천주교도의 체포를 반대하면서 이를 주도한 임태영 등이 파면되었고 박해는 끝이 났다. '경신사옥', '경신교난'이라고도 한다.
임술민란(1862년, 철종 13년)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한 농민 봉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약화되어 전정·군정·환곡의 삼정이 문란해지고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가혹한 수탈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켰다. 백낙신은 잘못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군은 부정관리를 죽이는 등 6일 동안 그지역 토호의 가옥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리고 이후 민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수십 차례에 걸쳐 곳곳에서 일어났다.
병인박해(1866년, 고종 3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누적된 천주교에 대한 반감과 대원군의 정치적인 선택 등 다양한 요인이 맞물리면서 조선 정부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여 명의 가톨릭교도를 학살했다. '병인교난' 또는 '병인사옥'이라고도 한다.
병인양요(1866년, 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의 결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는 텐진에 있는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로즈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를 죽인 책임자를 엄벌하고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조선에게 요구했다. 나중에 프랑스는 강화도에서 철수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서적과 은괴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신미양요(1871년, 고종 8년)
미국 군함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해협에 침입한 사건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문책을 구실로 군함을 동원한 무력을 이용해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했다. 미국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를 탈환하는 등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목표로 했던 조선 개항에는 실패했다. 대원군은 이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하게 펼치며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병자수호조약(1876년, 고종 13년)
운요호(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불평등 조약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한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침입해 의도적으로 한일 간의 충돌을 일으켰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배상과 함께 수교를 요구했다. 그 결과 일본의 강압에 의해 불평등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되었고, 일본 식민주의 침략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임오군란(1882년, 고종 19년)
구식 군대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변란
개화정책에 따른 개혁으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구식군대인 무위영과 장어영의 군졸들은 크게 차별을 받으며 급료 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한달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마저 양은 부족하고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군병들은 선혜청 도봉소에서 난리를 일으키며 시작되었다. 이에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손에 넣었으나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후 일본과 조선은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갑신정변(1884년, 고종 21년)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급진파 개화당이 일으킨 정변
개화당은 임오군란으로 청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자 이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후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새로운 정부를 세우며 14개조의 정강을 공포했으나 청나라 군대에게 진압되며 3일 천하로 끝났다. 이에 개화당 수십 명이 피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는 한성조약을, 청나라와는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갑오농민전쟁(1894년, 고종 31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항거하며 일어난 농민운동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대해 항거하며 농민들과 전봉준 등 동학도가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이다. 한때, 관군을 무찌르는 등 그 위세가 대단했으나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며 실패로 끝났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농민 운동으로 조선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갑오개혁과 의병 투쟁 등으로 연결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라고도 한다.
갑오개혁(1894년, 고종 31년)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된 세 차례의 개혁 운동
동학농민운동 이후 개화파 세력이 정권을 잡아 3차에 걸쳐서 행해진 근대적 제도 개혁이다. 개화파가 정권을 잡은 후 재래식 문물제도를 근대식으로 고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대규모 혁신을 단행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했던 개화파들이 일본의 위세를 업고 추진한 개혁으로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제3차 갑오개혁은 을미개혁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을미사변(1895년, 고종 32년)
일본이 명성 황후를 시해한 사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등은 조선 내의 친러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후 친러파 등은 고종을 몰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을미사변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이라고도 한다.
을미개혁(1895년, 고종 32년)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이 실시한 개혁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이 일본의 위세를 업고 추진한 개혁이다.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실시, 소학교 설치, '건양' 연호 사용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아관파천 후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면서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한다.
을미의병(1895년, 고종 32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유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항일 의병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살해당하여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단발령이 시행되며 분노가 촉발되어 일어난 의병이다. 특히 유생들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의병의 중심축이 되었다. 이후 친일정권이 무너져 단발령이 철회되고, 왕이 해산 권고를 하면서 의병들은 대부분 해산했다.
을사늑약(1905년, 광무 9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 동맹 등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 대사로 군대를 동원하여 조약 인준을 강요했다. 이에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이 이에 찬성하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어 '늑약'이라고 한다. 이로서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을사오조약', '제2차한일협약', '한일협상조약'이라고도 한다.
정미칠조약(1907년, 융희 1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해 마지막 조치로 강행한 7개항의 조항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에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의 위임 등의 내용을 담은 각 조항의 시행에 관한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일신협약'이라고도 하며, 정미7조약 체결에 찬성한 내각 대신 7인을 정미칠적이라고 한다.
정미의병(1907년, 융희 1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칠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은 서울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부대에 참여했다. 이처럼 무기를 가진 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의병의 전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전술도 다양해졌다. 그리고 전 계층이 항일의병에 참여하게 되면서 의병의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일부는 독립군이 되어 항일운동을 펼쳐나갔다.
경술국치(1910년, 융희 4년)
일제가 강제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일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 등을 거치며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었던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강제로 일본에 편입되었다. 경술국치는 '경술년에 있었던 국가적인 치욕'을 뜻하며 지금은 '국권피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미독립운동(1919년)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에 항거해 일어난 민족 독립운동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후 탑골공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후 전국과 해외로 확산되었으나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사용해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3·1운동(삼일운동)'이라고 부른다.
경신참변(1920년)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은 대규모 부대를 보내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독립군이 일본군이 공격하기 힘든 곳으로 이동하여 토벌에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청산리전투에서도 크게 패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여 가옥, 교회, 학교 등을 불태우며 3600여명의 한국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간도참변'이라고도 한다.
병인만세운동(19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
1926년 6월 10일,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례일을 기하여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으로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만큼 대규모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침체된 민족 운동에 활기를 안겨주며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했다. '6·10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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