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정미칠적’은 1907년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에 찬성한 7명의 친일파 대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 시켜, 순종을 황제에 즉위 시킨 후 7월 24일, 대한제국 식민지화 조치의 일환으로 조약 안을 제시하여, 정미칠적이 서명하였다. 또한, 협약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기재한 각서도 체결하였으나 이는 공표되지는 않았다. 이후, 통감 권한의 확대로 행정권을 넘겨주었고 재판소와 감옥 설치로 탄압의 수위가 높아졌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 시키면서 군권 마저 일본에 빼앗기며 힘을 잃었다. 을사조약으로 힘을 잃은 대한제국이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체결되어 사실상 일본의 속국화 되었다.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영상으로 보실 분은

맨 아래 사진

유튜브 링크를 올려 두었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 -


이완용


을사조약 체결 찬성으로 을사오적에 포함된 그는 총리 대신으로 정미 7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이자, 1909년, 사법권을 박탈한 기유각서의 당사자, 1910년, 국권을 박탈한 경술국치의 당사자이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 포함된 인물로 지금도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원래, 백작이었으나 이후 승작하며 후작에 올라 정미칠적 중에 가장 높은 귀족 등급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족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일본에게 최고 등급 훈장인 ‘국화대수장’을 받기도 했다. 1909년, 이재명 의사에게 습격을 당했으나 최고 수준의 의료 수술을 받으면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폐에 입은 관통상으로 평생 시달렸고 결국, 1926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밖에도 친인척 중에 5명이 작위를 받는 등그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친일 행위를 했다. 그는 친일 행각과 땅 투기로 재산을 더 불린 후, 부동산 대부분을 팔아 현금화 하여 유산으로 남겼고, 광복 이후에도 후손들이 땅을 거의 처분하면서 그의 재산을 추적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1992년에는 그의 후손이 시가 30억 원 상당의 북아현동에 위치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소송에 승소하면서, 친일파 승소 판례로 남아 한 때,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이 줄을 이으면서 ‘국유지가 아닌 경우’, 친일파 재산 반환 소송은 한 동안 친일파가 승소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당시, 승소한 이완용의 후손은 반환 받은 토지를 바로 매각한 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으며 이완용 보다 더 나쁜 놈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많다. 그는 갑신정변을 실패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조선 정부로부터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김옥균에게 설득 당하여 그와 동지가 되었다가 이후, 그가 암살 당하자 정부에 반감을 품었다. 창씨개명을 가장 먼저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노다 헤이지로’ 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하였다. 1904년, ‘유신회’를 조직, ‘일진회’로 개명하고 이를 통해 강제 병합 전까지 친일 행각을 했다. 일진회는 ‘국민신보’를 발간하여 일본을 옹호하며 국내 여론을 조작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친일을 계속하여 1920년 백작이 되었다. 이완용과 함께 고종의 퇴위를 적극 지휘하여 사죄하는 의미로 ‘자결하라’는 망언을 하였고, 1909년,일진회를 통해 한일 합방 요구 성명서를 발표하여 순종에게 이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1911년, 한일 합병 1주년에 매일 신보 특집 호에 합병에 대한 기념 축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1925년, 69세의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백작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물려 받았다. 그의 아들인 송종헌도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세도가로 행세했고 손자인 송재구는 홋카이도 땅을 매입하기도 했다. 증손자는 ‘친일파 국가귀속 관련 특별법’이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을 내었으나 기각되었고 2007년, 국유지 사기 행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 군부대신 이병무 -


이병무


1894년, 보빙사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넘어간 후, 일본 교도단을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 무관 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일본과 교류하였고, 군사 분야 친일파로 활동했다. 한때, 친일로 구금 ,유배 등을 당하기도 했으나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복직, 승승장구했다. 1907년, 이완용의 내각에 군부 대신으로 입각하여 이완용이 주도한 고종의 퇴위에도 적극 참여하여 어전에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하며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아시냐’ 고 물으면서 양위를 거부하는 고종에게 강한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정미 7조약 체결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할 때 군부대신 자격으로 해산을 주도하고 협력했으며, 해산된 군대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진압을 지휘해 자신의 옛 부하들을 괴멸 시켰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체결에도 찬성하면서 그는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었다. 그는 일본에 협력한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이후, 일본군으로 활동하여 중장 계급까지 올랐다. 그는 많은 훈장을 받았으며 1926년, 63세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 작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증손자는 국회의원, 국무총리비서실장을 거쳐 환경부 차관, 친환경 경영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 탁지부대신 고영희 -


고영희


통역, 수행원, 주 일본 공사 등으로 일본을 방문하며, 결과적으로 일본 통으로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 탁지부 대신으로 입각, 고종 황제의 퇴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탁지부 대신으로서 시정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총감과 ‘일시대부금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고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죽임을 당하자 장충단에서 관민 추도회를 열어 그를 추모하였으며 정미 7조약 찬성으로 정미칠적에 이름을 올린 후, 한일 병합 찬성으로 경술국적에도 포함되었다. 1910년, 합일 강제 병합 후 자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 총독 자문 기구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911년, 한일 병합 1주년 기념 매일 신보 특집호에 한일 합병을 찬양하는 축사를 기고하기도 했으며 메이지 천황 추도식에 조선 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1916년, 68세에 사망, 장남이 작위를 계승했다. 장남인 고희경도 나중에 중추원 고문을 지내면서 부자가 중추원 고문을 지낸 가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고희경은 부친 고영희의 작위를 뛰어 넘어 1920년, 백작으로 승작이 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친일파들의 재산이 국가로 환수 되면서 그 후손들이 반발하며 많은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2009년, 고희경 후손들은 물려 받은 땅을 판 돈을 반납하여 자진 환수의 첫 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영희의 손자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자, 고영희의 후손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하며 작위를 승계했을 뿐이고, 불합리 하다고 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1,2심에서 패소 했다. 


- 법부대신 조중응 -


조중응


조중응은 일찍부터 북쪽은 막고 남쪽을 열자는 ‘북방남개론’을 주장, 일본 친화적 성향 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도 가담하였고, 명성황후의 폐비 조칙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붕괴하게 되자 일본으로 가서 10 여년 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일본인과 결혼했는데, 이미 아내가 있었던 그는 나중에, 고종의 중재로 둘 다 정실로 삼기도 했다. 러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귀국하여 이완용 내각에 법부 대신으로 입각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에 협력하였고 이토 히로부미 총독이 죽기 몇 달 전, 그의 앞에서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낭독하기도 하였고, 그가 죽자 장례식에 내각 대표로 참석했다. 1910년, 한일 병합에도 찬성, 경술국적이 되었고 일본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자작 작위를 주었다. 그는 데라우치 총독과 이완용과의 3자 회담에서 한일 병합 조약 초안에 대해 협의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식 유교를 일본식 유교로 바꾸기 위해 경학원을 설립하는데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9년, 60세 사망, 장남이 작위를 계승했다. 나중에, 조중응의 후손들도 국가에 환수된 땅을 돌려 달라고 소송 했다가 결국 패소 하였는데, 이는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 환수에 불복하여 국가에 소송을 낸 것의 첫 판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응의 후손들 중에 대부분이 보유한 재산을 처분하여 제 3자에게 매각한 후, 이미 일본에 귀화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 학부대신 이재곤 -


이재곤


그는 왕실의 근친으로 고종과 가깝게 지냈다.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 대한제국의 국호와 연호의 개정을 주장하면서 고종의 환심을 샀고, 이후 요직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1906년, 황실의 재산 정리를 주도하였고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도 참여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며 지탄을 받았고, 정미 7조약 체결 찬성으로 정미칠적이 되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한자 통일회 이등박문 추도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여러 친일 단체의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1910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주로 불교계와 왕실을 중심으로 친일 행각을 하며, 관련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한일 합병 1주년을 기념하는 매일신보 특집호에 한일 합병을 기념하는 축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3.1운동 후, 그는 귀족 작위를 반납하려 했으나 일본 정부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3년, 85세 사망, 작위는 장손이 계승했다. 그와는 달리 넷째, 다섯째 아들은 독립 운동가로, 째인 이관용은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다섯 째인 이순용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이재곤의 후손도 친일파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자 이에 소송을 냈으나, 2009년 패소하기도 했다.


- 내부대신 임선준 -


임선준


1907년, 이완용 친일 내각에서 내부 대신을 맡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에 협력하였다. 특히, 이완용의 며느리가 임선준의 조카 딸로서, 임선준과 이완용, 두 친일파는 사돈지간이다. 한국을 시찰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한 친일파들과 함께 ‘신사회’를 조직하였으며 1908년, 탁지부 대신이 되자 재무를 총괄하여 직책을 친일 행각을 하는데 적극 사용하였다. 의병의 목표가 되어 처단 당한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도 하였고 재직 당시, 지방에 위치한 일본 소유로 된, 군용지, 철도 용지에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여러 친일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등 일본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는 등, 꾸준히 친일 행각을 벌이면서 지탄을 받았고 1919년, 60세에 사망, 아들이 작위를 계승했고 손자까지 습작 하여 3 대가 친일 명단에 올랐다. 2007년, 친일파 재산 국가 귀속 2차 결정에서 일부 재산(189㎡)이 귀속 결정이 되기도 했다.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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