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과 그 후손들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당시 조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고종이 불참한 회의에서 8명의 대신 중에 5명이 찬성하자 일본은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당시,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을 했던 사람은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이 을사조약에 찬성하였다. 이 외에 참정대신 한규설, 법부대신 이하영,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머지 3명 중 이하영과 민영기도 변절 하여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 이후 작위를 받았다. 이하영은 자작, 민영기는 남작 작위를 받아 결국, 한규설을 제외한 7명이 작위를 받았다. 한규설은 체결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로 반대를 했음에도 원망과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당시 일본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으며 끝까지 조약 체결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로 한일 강제 병합이 된 후, 일본이 준 남작 작위를 끝까지 거부하기도 했다.
을사오적과 그 후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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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대신 이완용 -
이완용은 이중 가장 높은 ‘후작’ 작위를 받았고 을사조약 이외의 큰 사건들에도 관여하였다. 1907년에는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의 양위를 주도하고 순종을 즉위 시켰으며, 반일 단체에 의해 그의 집이 불타기도 했고 정미 7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칠적이 되며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합될 때도 한일 병합 조약에 찬성한 경술국적이기도 하다.
2018/10/30 -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 - 정미칠적과 그 후손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비난, 경고하면서 일본에게는 탄압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여러 친일적인 행동과 정책을 펴며 친일파 중에서도 처단해야 할 1 순위로 꼽혔다. 1909년, 명동 성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에게 피습 당해, 폐가 관통 되는 등 칼로 3군데를 찔리면서 그는 치명상을 입었고 생사에 기로에 섰으나 일본 외과의들이 최고의 의료 기술을 동원하면서 이완용은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당시, 그가 수술 받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이 때 생긴 폐 질환으로 평생 고생하다가 17년 뒤인 1926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또한, 그의 친일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아들, 손자, 사돈 등 친인척 수십 명에 이르렀고 그 중, 손자가 그의 후작 자리를 계승하는 등 일본에게 작위를 받은 사람 만 해도 5명이었다. 나중에 이완용 등 친일파 재산을 환수했으나 이는 쉽지 않았고 결국 환수한 재산은 적었다. 그의 증손자는 소송으로 그의 땅을 되찾아 팔고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당시 30억 원 상당)
-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
권중현은 을사조약 찬성으로 을사오적이 되었고 그 공로로 일본에게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이른 나이에 일본어를 습득, 통달하면서 일찍 부터 친 일본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이후, 친일 성향의 개화파에 가담하는 등 여러 모로 대표적인 일본 통으로 활동한 경력으로 을사오적에 이름을 올린 것도 당연시 될 만큼, 처음부터 계속 일본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을사오적이 된 후, 여러 차례 목숨을 위협 받아 외출할 때는 항상 일본군을 대동 하고 다녔다. 1907년, 을사오적 암살단이 그를 습격했으나 암살이 미수에 그치면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또한, 의병을 탄압하는 등 꾸준한 친일 행동으로 일본 제국에게 수 차례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19년, 일본에 항거 하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작위를 반납하려 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말년에는 비교적 편안한 삶을 보내며 지냈고 1934년 , 8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외부대신 박제순 -
박제순은 을사조약을 서명한 실제 당사자로 을사오적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체결 당시, 대한제국 외부 대신의 자격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조약을 조인하며 을사조약에 찬성한 나머지 을사오적과는 달리 실제 을사조약 체결의 당사자로 기록되었다. 보통, 이완용이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이긴 하지만 을사오적 중에서는 박제순이 가장 중죄인에 해당한다.
고종의 위임장이 없이 박제순의 날인만 있어 을사조약의 효력이 없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이후, 반대한 한규설에 이어 참정대신이 되었고 이완용의 내각에서는 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10년의 한일 병합 조약에도 찬성하며 5명의 을사오적 중에서도 이완용과 함께 경술국치를 주도한 ‘경술국적’ 8인에도 포함되며, 우리나라 국민들의 많은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협력하며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그 공로로 일본에게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별다른 탈 없이 나머지 생을 살다가 1916년 59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도 친일파 관리로서 활동하였는데, 손자인 박승유는 이들과 다른 행보를 걸었다. 아버지의 지시로 일본군에 입대한 박승유는 평소 가족의 친일 행각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에, 몰래 탈영하여 독립군에 입대하였으며, 독립군에서 음악의 소질이 있었던 특기를 살려 애국가, 가곡 등을 부르며 애국심을 고취 시켰고 독립군을 모으는 역할을 하며 심리전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자원 입대를 하기도 하며 나중에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박제순은 손자인 박승유가 독립 운동을 하자, 박승유의 이름을 가문에서 빼버리기도 했다.
- 군부대신 이근택 -
이근택은 을사오적이 된 후, 많은 지탄을 받았으나 경술국치 후, 일본에게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임오군란 때 피난 온 명성황후에게 매일 싱싱한 생선을 잡아 바쳐 발탁되었고 어느 날, 우연하게 일본 상점에 들렀다가 살해 당한 피 묻은 명성황후의 띠를 발견해 엄청난 거금을 주고 구매하여 고종에게 바쳐서 고종과 세자에게 신임을 얻어 중앙에 진출했다. 친러파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하자 친일파로 선회하여 을사조약 체결이 되기 전, 이미 그는 친일파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특히, 경위원 총관, 헌병 사령관 등, 군사 분야와 관련한 직책을 주로 맡았으며 을사조약 전에는 군부 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1906년에는 기산도 의사의 습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치며 목숨을 겨우 부지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친형인 이근상이 ‘남작’ 작위를, 그의 동생인 이근호도 ‘남작’ 작위를 받았고, 그들의 아들들도 그들의 귀족 작위를 계승하면서 가문에서 무려 6명의 일본 귀족이 나왔다. 참고로, 1997년 이완용 증손자가 승소하면서 친일파 후손의 재산 반환 관련 판례가 생겨, 한 때,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이 급격히 증가했고 많은 소송에서 친일파들이 승소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그 중에서 이근택의 동생인 이근호의 후손은 국가 상대로 소송을 수 차례 진행하기도 했다.
- 내부대신 이지용 -
이지용은 1905년, 을사조약에 찬성한 공로로 경술국치 후, 일본에게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재긍(흥선대원군 형의 아들)에게 입양되어 고종 황제의 오촌 조카로서 왕족에 편입되었다. 1904년, 외부 대신 서리로서 일본 공사 하야시와 한일 의정서를 체결한 조약 체결의 당사자로서 한일 의정서를 주도하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죄로, 분노한 군중에게 그의 집이 불타기도 하였다. ‘을사오적 암살단’은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권중현 암살이 미수에 그친 것이 보고되어 그의 암살을 막기 위해 병사들이 호위하면서, 을사오적 암살단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을사오적이 된 후, 친일 행각은 계속 되었으나 1907년, 우리나라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이지용을 협박, 회유하면 이를 막으려고 한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를 따르지 않았고, 같은 해, 정미조약 체결에도 나서지 않으며 친일 관련 핵심 사안에서는 나서지 않았다. 이후, 이지용은 심각한 도박 중독자가 되었는데 친일로 모은 수많은 재산을 통째로 날렸고, 한 때, 일본 귀족의 작위가 정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도박을 계속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28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백작 작위는 그의 양손자가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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