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골품제도
골품제도는 혈통에 따라 출세, 가옥의 규모, 혼인 상대, 옷의 색깔, 말의 장식 등 거의 사회 전반에 제약을 주는 엄격한 신분제도로,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은 신라시대의 근간이었던 골품제도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골품제도의 구성
성골 성골은 가장 높은 신분으로, 왕위 계승권을 가지는 왕족이며, 진덕여왕까지 왕을 배출하였습니다.
성골은 폐쇠적이며 수도 적어 결국 진덕여왕 이후부터는 소멸하여 진골 출신의 무열왕이 처음으로 왕이 됩니다.
진골
진골은 신라 왕족을 포함하여 최고 등급의 귀족신분이었습니다. 대부분 경주 김씨와 박씨로 구성되었으며, 신라가 정복한 국가 중 규모가 큰 국가의 왕족도 진골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진골은 모든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집은 24척의 규모를 넘길 수 없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왕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귀족 중 우두머리로, 큰 권력을 누리고 살았던 계층입니다. 더구나 진덕여왕 이후부터는 성골의 수가 크게 줄어들며 진골에서 왕까지 배출하게 됩니다.
6두품 ~ 4두품
일반적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신분이 6두품, 5두품, 4두품이었습니다.
6두품
6두품은 진골 바로 아래에 있는 귀족으로, 어느정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출세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했습니다. 또한 관직은 6등급인 아찬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가옥은 21척까지로 제한되었습니다.
5두품
5두품은 하위귀족 중 하나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은 10등급인 대나마였습니다. 집은 18척로 제한되었습니다.
4두품
4두품은 최하위 귀족으로 12등급인 대사 관직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집의 크기도 15척까지로 제한되었으며, 말도 2마리만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집을 꾸미거나 장식할 때 쓸 수 있는 재료도 제한되었으며, 심지어 속옷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3두품 ~ 1두품
3두품, 2두품, 1두품은 관리가 될 수 없는 신분으로 후에는 평민과 별반 차이가 없어집니다. 집도 15척 이상의 규모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골품제도와 결혼
골품제도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같은 신분끼리만 혼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수가 적은 최고위층 성골은 결혼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진덕여왕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같은 진골 내에서도 신라에 편입된 군소국가의 왕족과 혼인하는 것은 꺼렸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금관가야의 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 (군소국가 왕족 출신 진골) 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의 딸인 만명공주 (김유신의 어머니) 의 연애는 처음에 숙흘종의 무서운 반대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태종무열왕도 김유신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신라 왕족과 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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